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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력의 극치를 보여준 친일파

생존력의 극치를 보여준 친일파

한국 친일파들의 정치적 생존력은 경이적이다. 그들이 섬기던 일본제국이 패망했는데도 거의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았다. 해방 직후에 그들을 겨냥한 민중항쟁이 대구와 제주와 여수·순천에서 일어났는데도 별 타격을 받지 않았다.그들을 비호하고 계승하는 세력은 4·19와 부마항쟁(부산·마산)과 6월항쟁과 촛불혁명에도 살아남았다. 해방 80주년을 1년 앞둔 지금까지도 친일 청산이 지지부진한 원인 중 하나는 이들의 생존력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런 생존력을 온몸으로 보여준 인물이 있다. 지금의 한국인들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알고 보면 꽤 경이적인 인물이다. 이승만 집권기인 1953년부터 1960년까지 대법관을 지내고 4·19 직후에 대법원장 직무대리를 겸했던 김갑수(金甲洙)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김갑수는 지금의 헌법재판관인 헌법위원직도 이승만 집권기와 박정희 집권기에 각각 역임했다. 또 독립운동가이자 진보 정치인인 조봉암에 대한 사형선고를 확정한 주심 대법관이었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에 비해 한국 현대사에 남긴 족적이 꽤 큰 인물이다.일제와 미군정에 이어 이승만 정권과도 제휴김갑수는 일제 강점 2년 뒤인 1912년 3월 7일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1935년 3월에 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한 그는 그해 8월 공주지방법원 판임관견습이 되고 11월에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이듬해 5월에는 사법관시보가 됐고, 대구지방법원에서 검사국 검사대리로 부역했다. 법원과 검찰이 분리되지 않은 시절이라 '법원 검사국 검사대리'라는 직책이 가능했다.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갑수 편은 "사법관시보를 마친 후 1937년 12월 평양지방법원 예비판사(고등관 7등)에 임명"됐다고 한 뒤, 1938년에 평양지방법원 판사가 되고 1941년에 평양복심법원 판사까지 겸했다고 설명한다. ▲1973년 12월 17일 자 경향신문 기사 "내가 겪은 이십세기 - 백발의 증인, 원로와의 대화"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그는 61세 때인 1973년에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인터뷰를 경향신문과 했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조선총독부 판사로 근무하던 시절에 별일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해 12월 17일 자 경향신문 4면에 얼굴 사진과 함께 대문짝만하게 실린 이 인터뷰 기사는 "해방이 되던 45년까지 7년 반 동안 판사로서 단조로운 사건만을 다루어왔다"고 말했다.그는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인 법관에게 큰 사건은 맡기지 않고 고작 민·형사 단독이나 배석 자리만을 주었"다고 강조했다. 한국인이라서 일본인 법관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던 처지를 설명하는 의미도 담기고, 자신은 굵직한 독립운동 사건을 맡은 일이 없음을 어필하는 의미도 담긴 발언이다."단조로운 사건"을 다뤘든 비중 있는 사건을 다뤘든, 일제 통치 시스템의 최상부에서 한국인들을 사법적으로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다. 거기다가 1935년부터 9년간 조선총독부의 녹봉으로 친일재산을 모았다. 그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는 것은 불가피했다.평양지방법원 및 평양복심법원 판사 시절인 1945년, 김갑수는 서른세 살 나이로 해방을 맞이했다. 섬기던 주인이 패망하는 이 위급한 상황에 대한 그의 대응은 꽤 신속했다. 위 경향신문 인터뷰 기사는 "해방과 함께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 법원을 해산해버려 김씨는 38선을 넘었다"고 기술한다.남하한 김갑수는 곧바로 직장을 구했다. 그해 11월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로 취직했다가 1946년 9월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달부터 그는 새로운 나라를 주인으로 받들었다. 친일인명사전은 "미군정청 사법부 조사국장에 임명"됐다고 기술한다.일반적인 친일파들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일본제국과 미군정에 이어 이승만 정권과도 제휴한다. 1945년에 출범한 이승만 정권하에서 법전편찬위원, 법무부 법무국장 겸 대검찰청 검사, 법무부 차관, 내무부 차관에 이어 대법관을 지낸다. 그러다가 1960년 4·19혁명을 맞이한다.조봉암 탄압 사법적 합리화에 관여윤석열 정권이 검사 출신들을 중용하는 것과 달리, 이승만 정권은 판사 출신들을 중용했다. 1971년 8월 14일 자 조선일보 '전관(轉官)'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인재는 법원에서'라는 말이 유행했다면서, 대법관 백한성이 "경무대의 호출 전화를 받고 이 대통령에게 불려가 그날로 내무부 장관 감투를 얻어 들고 얼떨떨했다"는 에피소드를 전한다.전직 판사이자 검사인 김갑수는 위 에피소드 4년 전인 1949년에 '내무부 차관 감투'를 썼다. 경무대가 김갑수 역시 '인재'로 봤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그 뒤 대법관으로 옮겨간 김갑수는 47세 되던 해에 이승만 정권에 큰 공로를 세운다. 1959년 2월 27일 이승만의 정적인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한 주임 대법관 2명 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조봉암에게 간첩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죄 등을 적용해 이승만 정권의 조봉암 탄압을 사법적으로 합리화시키는 데 관여했던 것이다.위 경향신문 인터뷰에도 언급됐듯이, 대법원 재판부 내에서 합의된 형량은 무기징역이었는데도 경무대의 지시에 의해 사형으로 바뀌었다는 의혹이 당시에 존재했다. 의혹이 사실이라면 김갑수를 비롯한 대법관들은 법관의 자질이 없었다는 의미가 된다.그런 지시가 없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2011년 대법원 재심 판결로도 밝혀졌듯이 조봉암은 간첩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세웠다면, 김갑수 등이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김갑수는 3심 선고 5개월 뒤인 1959년 7월 30일에는 조봉암의 재심 청구를 기각했다. 그로부터 17시간 뒤에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김갑수가 깊숙이 관여한 정치 재판이 이처럼 비상식적인 사형집행으로 결말을 맺었으니, 그와 이승만 정권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전직 판사이자 검사인 사람이 내무부 차관에 임명된 것부터가 심상치 않았다.이승만이 쫓겨난 뒤 김갑수도 법원을 나왔다. 위 조선일보 기사는 그가 "대학 교수들이 '대법관들도 물러가라'고 해서" 대법원을 나왔다고 전한다.이처럼 그는 자신이 4·19의 성토 대상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4·19 직후에 공직에 재차 도전한다. 친일인명사전은 "1960년 7월 실시된 제5대 민의원 선거에 경기도 안성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됐다고 말한다. 4·19혁명으로 갈 곳이 없어진 상황에서 고향 안성을 찾아가 국회의원으로 변신했던 것이다.이익 향해 맹렬히 달려가는 친일파의 모습그는 제3공화국에서는 집권당 당료로 되살아났다. 52세 때인 1963년에 민주공화당 서울시 부위원장이 되고 1966년에 공화당 서울시 마포구 위원장이 되고 1967년에 당 중앙위원이 됐다. 1971년에는 당 인권옹호위원장이 됐다. 4·19 직전에 헌법위원회 위원이 된 적이 있는 그는 유신체제 하인 1973년에도 61세 나이로 헌법위원이 됐다.일본제국과 미군정에 이어 대한민국 역대 정부의 고위 공직에 진출한 김갑수는 나이 70을 앞둔 시점에는 전두환 정권과도 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이 인연은 '요상한' 방식으로 맺어졌다. ▲1991년 5월 21일 자 경향신문 기사 "5공 막후(18) - 신군부 야권분할 4개각본"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전두환의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창당 주역 중 하나가 권정달이다. 그의 증언을 기초로 한 1991년 5월 21일 자 경향신문 '5공 막후 (18) 신군부 야권 분할 4개 각본'에도 보도됐듯이, 전두환 정권은 '건전 야당'뿐 아니라 '건전 혁신야당'까지 만들어 구색을 갖추고자 했다.1991년 6월 8일 자 경향신문의 '5공 막후 (23)'에 따르면, 전두환 정권은 4·19 당시의 혁신계 정치인인 민주사회당의 고정훈이 서울 강남구에서 당선되도록 하기 위해 강남구를 정책지구로 지정했다. 요즘 말로 하면, 여당이 야당 후보를 지원하고자 전략지역을 지정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유력한 관제 야당인 민한당과 국민당은 강남구에 후보를 내지 않았다.김갑수는 바로 그 고정훈과 합세해 제5공화국하에서 '건전 혁신야당' 건설을 추진했다. 1981년 1월에 신정당을 만들어 이 당을 관제야당 후보군에 넣은 김갑수는 국회의원이 된 고정훈과 합세해 1982년 3월 25일 신정사회당을 만들었다. 고정훈이 총재가 되고 김갑수가 의장이 되는 당이었다. 의석 3석을 보유한 원내 제4당이었다.전날인 24일, 민주사회당과의 합당을 위한 신정당 임시전당대회가 열렸다. 25일 자 조선일보 '신정당, 합당 결의에 우여곡절'에 따르면, 일부 대의원들은 김갑수에게 "대법원 판사 재직 시 조봉암에게 사형선고를 한 김 총재가 사회주의 정당과 합당한다니 말이 안 된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신정사회당 창당이 신군부의 관제 혁신야당 구상에 부합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 당원들의 반발로 볼 수 있다.김갑수는 자신에게 녹봉을 주던 일본제국이 패망한 뒤에도 공직을 이어갔을 뿐 아니라 자신이 4·19 시위대의 성토 대상인 줄 알면서도 그 직후에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거기다가 조봉암 사형선고의 주역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에 개의치 않고 전두환 정권의 관제 혁신야당 구상에 부합하는 정치 행보를 걸었다. 불리한 과거에 개의치 않고, 그것을 반성도 하지 않고, 이익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는 한국 친일파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출처:오마이뉴스


생존력의 극치를 보여준 친일파

생존력의 극치를 보여준 친일파

한국 친일파들의 정치적 생존력은 경이적이다. 그들이 섬기던 일본제국이 패망했는데도 거의 아무런 피해를 보지 않았다. 해방 직후에 그들을 겨냥한 민중항쟁이 대구와 제주와 여수·순천에서 일어났는데도 별 타격을 받지 않았다.그들을 비호하고 계승하는 세력은 4·19와 부마항쟁(부산·마산)과 6월항쟁과 촛불혁명에도 살아남았다. 해방 80주년을 1년 앞둔 지금까지도 친일 청산이 지지부진한 원인 중 하나는 이들의 생존력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런 생존력을 온몸으로 보여준 인물이 있다. 지금의 한국인들에게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알고 보면 꽤 경이적인 인물이다. 이승만 집권기인 1953년부터 1960년까지 대법관을 지내고 4·19 직후에 대법원장 직무대리를 겸했던 김갑수(金甲洙)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김갑수는 지금의 헌법재판관인 헌법위원직도 이승만 집권기와 박정희 집권기에 각각 역임했다. 또 독립운동가이자 진보 정치인인 조봉암에 대한 사형선고를 확정한 주심 대법관이었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에 비해 한국 현대사에 남긴 족적이 꽤 큰 인물이다.일제와 미군정에 이어 이승만 정권과도 제휴김갑수는 일제 강점 2년 뒤인 1912년 3월 7일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났다. 1935년 3월에 경성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한 그는 그해 8월 공주지방법원 판임관견습이 되고 11월에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이듬해 5월에는 사법관시보가 됐고, 대구지방법원에서 검사국 검사대리로 부역했다. 법원과 검찰이 분리되지 않은 시절이라 '법원 검사국 검사대리'라는 직책이 가능했다.<친일인명사전> 제1권 김갑수 편은 "사법관시보를 마친 후 1937년 12월 평양지방법원 예비판사(고등관 7등)에 임명"됐다고 한 뒤, 1938년에 평양지방법원 판사가 되고 1941년에 평양복심법원 판사까지 겸했다고 설명한다. ▲ 1973년 12월 17일 자 <경향신문> 기사 "내가 겪은 이십세기 - 백발의 증인, 원로와의 대화"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그는 61세 때인 1973년에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는 인터뷰를 <경향신문>과 했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조선총독부 판사로 근무하던 시절에 별일이 없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해 12월 17일 자 <경향신문> 4면에 얼굴 사진과 함께 대문짝만하게 실린 이 인터뷰 기사는 "해방이 되던 45년까지 7년 반 동안 판사로서 단조로운 사건만을 다루어왔다"고 말했다.그는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인 법관에게 큰 사건은 맡기지 않고 고작 민·형사 단독이나 배석 자리만을 주었"다고 강조했다. 한국인이라서 일본인 법관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던 처지를 설명하는 의미도 담기고, 자신은 굵직한 독립운동 사건을 맡은 일이 없음을 어필하는 의미도 담긴 발언이다."단조로운 사건"을 다뤘든 비중 있는 사건을 다뤘든, 일제 통치 시스템의 최상부에서 한국인들을 사법적으로 지배하는 위치에 있었다. 거기다가 1935년부터 9년간 조선총독부의 녹봉으로 친일재산을 모았다. 그의 이름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는 것은 불가피했다.평양지방법원 및 평양복심법원 판사 시절인 1945년, 김갑수는 서른세 살 나이로 해방을 맞이했다. 섬기던 주인이 패망하는 이 위급한 상황에 대한 그의 대응은 꽤 신속했다. 위 <경향신문> 인터뷰 기사는 "해방과 함께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 법원을 해산해버려 김씨는 38선을 넘었다"고 기술한다.남하한 김갑수는 곧바로 직장을 구했다. 그해 11월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로 취직했다가 1946년 9월 서울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달부터 그는 새로운 나라를 주인으로 받들었다. <친일인명사전>은 "미군정청 사법부 조사국장에 임명"됐다고 기술한다.일반적인 친일파들이 그러했듯이, 그 역시 일본제국과 미군정에 이어 이승만 정권과도 제휴한다. 1945년에 출범한 이승만 정권하에서 법전편찬위원, 법무부 법무국장 겸 대검찰청 검사, 법무부 차관, 내무부 차관에 이어 대법관을 지낸다. 그러다가 1960년 4·19혁명을 맞이한다.조봉암 탄압 사법적 합리화에 관여윤석열 정권이 검사 출신들을 중용하는 것과 달리, 이승만 정권은 판사 출신들을 중용했다. 1971년 8월 14일 자 <조선일보> '전관(轉官)'은 이승만 정권하에서 '인재는 법원에서'라는 말이 유행했다면서, 대법관 백한성이 "경무대의 호출 전화를 받고 이 대통령에게 불려가 그날로 내무부 장관 감투를 얻어 들고 얼떨떨했다"는 에피소드를 전한다.전직 판사이자 검사인 김갑수는 위 에피소드 4년 전인 1949년에 '내무부 차관 감투'를 썼다. 경무대가 김갑수 역시 '인재'로 봤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그 뒤 대법관으로 옮겨간 김갑수는 47세 되던 해에 이승만 정권에 큰 공로를 세운다. 1959년 2월 27일 이승만의 정적인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한 주임 대법관 2명 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조봉암에게 간첩죄 및 국가보안법 위반죄 등을 적용해 이승만 정권의 조봉암 탄압을 사법적으로 합리화시키는 데 관여했던 것이다.위 <경향신문> 인터뷰에도 언급됐듯이, 대법원 재판부 내에서 합의된 형량은 무기징역이었는데도 경무대의 지시에 의해 사형으로 바뀌었다는 의혹이 당시에 존재했다. 의혹이 사실이라면 김갑수를 비롯한 대법관들은 법관의 자질이 없었다는 의미가 된다.그런 지시가 없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2011년 대법원 재심 판결로도 밝혀졌듯이 조봉암은 간첩이 아니었다. 그런 사람을 간첩으로 몰아세웠다면, 김갑수 등이 법률과 양심에 따라 재판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된다.김갑수는 3심 선고 5개월 뒤인 1959년 7월 30일에는 조봉암의 재심 청구를 기각했다. 그로부터 17시간 뒤에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됐다. 김갑수가 깊숙이 관여한 정치 재판이 이처럼 비상식적인 사형집행으로 결말을 맺었으니, 그와 이승만 정권의 관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전직 판사이자 검사인 사람이 내무부 차관에 임명된 것부터가 심상치 않았다.이승만이 쫓겨난 뒤 김갑수도 법원을 나왔다. 위 <조선일보> 기사는 그가 "대학 교수들이 '대법관들도 물러가라'고 해서" 대법원을 나왔다고 전한다.이처럼 그는 자신이 4·19의 성토 대상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4·19 직후에 공직에 재차 도전한다. <친일인명사전>은 "1960년 7월 실시된 제5대 민의원 선거에 경기도 안성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됐다고 말한다. 4·19혁명으로 갈 곳이 없어진 상황에서 고향 안성을 찾아가 국회의원으로 변신했던 것이다.이익 향해 맹렬히 달려가는 친일파의 모습그는 제3공화국에서는 집권당 당료로 되살아났다. 52세 때인 1963년에 민주공화당 서울시 부위원장이 되고 1966년에 공화당 서울시 마포구 위원장이 되고 1967년에 당 중앙위원이 됐다. 1971년에는 당 인권옹호위원장이 됐다. 4·19 직전에 헌법위원회 위원이 된 적이 있는 그는 유신체제 하인 1973년에도 61세 나이로 헌법위원이 됐다.일본제국과 미군정에 이어 대한민국 역대 정부의 고위 공직에 진출한 김갑수는 나이 70을 앞둔 시점에는 전두환 정권과도 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었다. 이 인연은 '요상한' 방식으로 맺어졌다. ▲ 1991년 5월 21일 자 <경향신문> 기사 "5공 막후(18) - 신군부 야권분할 4개각본"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전두환의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창당 주역 중 하나가 권정달이다. 그의 증언을 기초로 한 1991년 5월 21일 자 <경향신문> '5공 막후 (18) 신군부 야권 분할 4개 각본'에도 보도됐듯이, 전두환 정권은 '건전 야당'뿐 아니라 '건전 혁신야당'까지 만들어 구색을 갖추고자 했다.1991년 6월 8일 자 <경향신문>의 '5공 막후 (23)'에 따르면, 전두환 정권은 4·19 당시의 혁신계 정치인인 민주사회당의 고정훈이 서울 강남구에서 당선되도록 하기 위해 강남구를 정책지구로 지정했다. 요즘 말로 하면, 여당이 야당 후보를 지원하고자 전략지역을 지정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유력한 관제 야당인 민한당과 국민당은 강남구에 후보를 내지 않았다.김갑수는 바로 그 고정훈과 합세해 제5공화국하에서 '건전 혁신야당' 건설을 추진했다. 1981년 1월에 신정당을 만들어 이 당을 관제야당 후보군에 넣은 김갑수는 국회의원이 된 고정훈과 합세해 1982년 3월 25일 신정사회당을 만들었다. 고정훈이 총재가 되고 김갑수가 의장이 되는 당이었다. 의석 3석을 보유한 원내 제4당이었다.전날인 24일, 민주사회당과의 합당을 위한 신정당 임시전당대회가 열렸다. 25일 자 <조선일보> '신정당, 합당 결의에 우여곡절'에 따르면, 일부 대의원들은 김갑수에게 "대법원 판사 재직 시 조봉암에게 사형선고를 한 김 총재가 사회주의 정당과 합당한다니 말이 안 된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신정사회당 창당이 신군부의 관제 혁신야당 구상에 부합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 당원들의 반발로 볼 수 있다.김갑수는 자신에게 녹봉을 주던 일본제국이 패망한 뒤에도 공직을 이어갔을 뿐 아니라 자신이 4·19 시위대의 성토 대상인 줄 알면서도 그 직후에 국회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거기다가 조봉암 사형선고의 주역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에 개의치 않고 전두환 정권의 관제 혁신야당 구상에 부합하는 정치 행보를 걸었다. 불리한 과거에 개의치 않고, 그것을 반성도 하지 않고, 이익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는 한국 친일파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출처:오마이뉴스

김민기 그리고 세상의 모든 ‘뒷것’들 [김영희 칼럼]

김민기 그리고 세상의 모든 ‘뒷것’들 [김영희 칼럼]

지난달 암으로 세상을 떠난 홍세화 선생의 장례식장에서 그에게 미리엘이라는 세례명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난해 12월 홍세화 친척의 요청으로 성공회 이대용 신부가 사회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인 그를 찾았다. 세례를 받겠냐는 물음에 한참 망설이던 홍세화는 ‘레미제라블’에서 은촛대를 훔쳐 도망간 장발장을 감쌌던 미리엘 주교의 관용의 정신이 자신을 이끈 신념이었다는 말을 꺼냈다고 한다. 노동자나 가난한 이들과 늘 함께 했던 그의 삶과 맞닿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이야기를 들려준 이영구 목사 또한 인상적이었다. 해외여행이 흔치않던 시절, 자수성가한 서울대 출신 사업가로 출장이 잦던 그는 친구 박호성(전 서강대 교수)으로부터 프랑스 파리의 홍세화를 한번 찾아가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1986년 센강변에서의 “운명적 만남” 이후 그는 평생의 벗이 됐다. 홍세화가 해외에서 근무 중이던 1979년 10월 내무부가 발표한 남민전 사건으로 망명객이 된 뒤 생계를 위해 야간 택시운전을 할 때, 이영구 부부는 해마다 두차례씩 한국 음식을 싸들고 고립된 생활을 하던 홍세화 가족을 찾았다.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나오는 데는 임진택·유홍준 같은 벗들의 권유와 출간 알선과 함께, 몇년간 운전을 멈추고 글을 쓰도록 생활비를 대준 이영구의 지원이 큰 힘이 됐다. 그런 이영구지만 자신을 내세우지도, 자신의 신앙을 권유하지도 않았다. 발인날 아침 가족과 몇몇 지인에게 이 신부를 소개하며 그는 “수십년을 곁에 있었는데도 거절당할까봐 한번도 종교를 권하지 못했는데”라며 웃었다. 이영구는 40대 후반 잘 나가던 사업을 접고 중증장애인을 돌보고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목사가 되어 살아오고 있다. 1970년대 홍세화 부부의 집을 드나들던 이들 가운데엔 김민기도 있었다. 에스비에스(SBS)가 최근 방영한 다큐멘터리 3부작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를 보면서 이 세상의 많은 ‘뒷것’들을 떠올렸다. 홍세화도, 이영구도 그런 존재이리라.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 후반은 행진곡풍의 ‘전투적’ 민중가요 신곡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시기였다. 그런데 왠지 난 ‘이 세상 어딘가에’ ‘강변에서’ 같은 노래가 좋았다. 김민기 노래는 당시 민중가요와 다른 결이 있었다. 다큐를 보며 새삼 깨달았다. 앞것이 아니라 뒷것을 자처한 그는 권력에겐 ‘반정부 좌익’이었지만 그 바탕엔 사람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2015년 이진순과 했던 한겨레 인터뷰에서 김민기는 70년대 보안사 취조실에서 ‘죽도록’ 맞던 당시, “나 때문에 이들이 죄를 짓고 있구나 싶어...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나중에 운동권 후배들에게 “너무 미워하지 마라. 미워하게 되면 걔 닮게 된다”고 말했다고도 했다. 다큐를 통해 새삼 알게 된 사실도 적잖다. 1979년 전두환의 12.12 쿠데타가 나던 날, 그는 달동네 아이들의 공공어린이집 설립 모금공연을 위해 정권의 탄압 속에 아예 몇년간 손에서 놓았던 기타를 다시 잡았다. 암울했던 1978년 송창식이 노래굿 ‘공장의 불빛’ 녹음실을 빌려주고 녹음까지 해줬다는 이야기엔 많은 사람들이 놀랬다. 그해 크리스마스이브, 들불야학을 운영하다가 과로에 연탄가스중독 사고로 숨졌던 전남대 학생 박기순의 영결식에 김민기가 나타나 ‘상록수’를 불렀다는 것도 그랬다. 나중에 박기순과 영혼결혼식을 했던 윤상원은 서울에서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노동운동을 위해 내려와 들불야학에 참여했다. 박기순도, 오월 광주 당시 죽음을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았던 시민군대변인 윤상원도 편하게 사는 ‘앞것’이 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던 ‘뒷것’이다. 70년대 유신의 ‘입틀막’ 시대에 대학과 공장, 탄광에서 김민기가 만든 노래는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의 입길을 틔웠다. 90년대 이후 학전의 실험을 통해선 연극을 하거나 인디음악을 하면 밥굶는 게 당연시되던 시스템을 바꿔냈다. 가수, 배우뿐 아니다. 유홍준(명지대 석좌교수)은 “90년대 운동판에서 내 강연을 다 헐값이나 공짜로 불러댈 때 처음 제대로 계약서를 쓰고 정산을 해준 게 김민기”라는 얘기를 종종 한다. 김민기는 2008년 장기흥행 중이던 ‘지하철 1호선’ 공연을 중단하고 아동극을 시작한 이유를 “돈되는 일만 하다보면 돈 안되는 일을 못할 것 같아서”라고 말하곤 했다. 김민기라고 왜 단점이 없겠는가. 하지만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인간이 존중받는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김민기는 그 가치를 자신의 삶에서 결벽일 정도로 지켜왔다. 외치거나 자신의 잣대로 남을 비난하지 않았다. 과거의 업적에 매달리지도 않았다. 그 치열함을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누구나 앞것이 되고 싶어하고 앞것에 환호하는 시대이지만 우리 사회 한 구석엔 그런 이들이 있다. 홍세화가 마지막 한겨레 칼럼에서 쓴 “진보나 좌파를 말하는 것과 진보나 좌파로 사는 것은 다르다”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스스로 말하듯 김민기는 이념가나 운동가는 아니지만, 어쩌면 가장 진보적인 존재가 이런 뒷것이 아닐까. 많은 자료영상을 사용한 다큐인데도 그의 최근 모습이 나오는 장면에선 카메라가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그가 허락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김민기는 끝까지 뒷것이다. 출처/자료:한겨레신문

2년 천하, 검사 정치는 끝났다

2년 천하, 검사 정치는 끝났다

윤석열 대통령이 3월22일 경기 평택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 열린 제9회 서해수호의날 기념식을 마치고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악수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꼭 2년 전,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참여연대 공동대표)는 한겨레 인터뷰에서 이렇게 주문했다. 법무부 장관에 지명된 한동훈 후보자를 향해 “모든 의혹을 풀어야 될 책임이 후보자에게 있다. (문제 된 휴대전화 내용을) 어떻게든 명백하게 국민들한테 제공을 해야 된다”고 지적했다. 또 “‘검찰 지휘부가 대통령의 측근이다’라는 외관이 있는 순간 검찰의 독립성 또는 객관성에 대해 국민의 신뢰는 무너지게 된다. 윤석열 당선자가 가장 강조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문제인 만큼 이 부분을 선도적으로 정리해야 한다”고 했다. 지극히 상식적인 요구였다. 그러니 시늉이라도 낼 줄 알았다. 그러나 정권도, 검찰도 이런 요구는 무시했다. 대부분 언론도 침묵했다. 이후 정권과 검찰이 독차지한 권력을 얼마나 제멋대로 휘두르며 ‘검찰공화국 2년’을 즐겼는지는 국민 모두가 지켜본 대로다. 그 독단의 관성은 총선까지도 이어졌다. 그리고 심판받았다. 2년간 국민의 복장을 뒤집어놓은 윤석열식 국정, 그리고 조롱거리가 된 한동훈식 선거는 검찰의 비뚤어진 유산에 그 뿌리를 대고 있다. 민주국가 중 우리나라처럼 검찰이 단일하고 독자적인 권력집단으로 자리잡은 유례가 없다. 수사·기소권이라는 막강한 권한을 한손에 쥐고, 일사불란한 조직적 응집력으로 뭉쳐 있다. ‘기소편의주의’라는 재량권을 무한정 확장해, 아무리 죄가 커도 거뜬히 봐주고 아무리 죄가 없어도 끈질기게 괴롭힌다. 철저히 조직적 이해관계에 따라서다. 더 큰 문제는 공정과 중립 원칙을 벗어나 검찰권을 남용해도 국민이 이를 통제할 수단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국민이 선출한 권력은 임기가 유한하지만, 검찰 조직의 권력은 지속된다. 후보 시절 윤석열 대통령이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을 두고 “대통령 임기 5년이 뭐가 대단하다고, 너무 겁이 없다”고 한 말에서 검찰의 영속하는 권력에 대한 자부심(?)이 드러난다. ‘아무도 우리를 건드리지 못한다’는 오만함이다. 검찰이 누리는 이 ‘무소불위의 영원한 권력’은 국민과 여론을 깔보는 선민의식, 우월의식으로 연결된다. 이에 도취해 있던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정치인이 된 뒤에도 자신들의 권력이 국민의 선택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잊은 듯했다. 민심에 역행하고 상식과 원칙을 파괴하는 ‘국정편의주의’가 열거하기도 힘들 만큼 횡행했다. 대통령 배우자의 주가조작 의혹은 공범들이 유죄 판결을 받았음에도 수사가 이뤄지지 않았고 특검법은 대통령의 특권인 거부권으로 막았다. 해병대원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수사가 진행 중인데 출국금지까지 당한 피의자를 대사로 임명해 출국시켰다. 선거를 코앞에 두고도 이런 기상천외한 일들을 벌인 것은 ‘검사식 오만’이 아니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범죄가 확정된 이들을 대통령이 특별사면하고 여당은 후보로 출마시켰다. 한동훈 전 위원장은 이런 후보를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면서 상대 당은 범죄자 집단이라고 몰아붙였다. “범죄자와 싸우는데 (국민들한테) 큰절을 왜 하냐”고 했다. 어떤 국회의원 후보자를 가리켜 “여기서 이러지 않아도 얼마든지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다. 여러분을 위해서 나왔다”고 했다. 국민을 민주정치의 주인이 아니라 박수꾼이나 동냥꾼 취급하는 망발이다. 국민을 바라보는 ‘검사식 시각’이다. 총선 결과는 이러한 ‘검사 정치’에 대한 탄핵이었다. 검사도 정치를 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러나 윤석열·한동훈식 검사 정치에 국민은 진저리를 쳤다. 검찰의 비뚤어진 유산을 체화한 최정점의 두 검사 출신이 ‘검사 정치는 더 이상 안 된다’는 민심의 심판을 끌어냈다. 이들의 충실한 부하였던 검찰도 함께 심판받았다. 야당과 전 정권 수사에만 일로매진한 검찰은 되레 ‘검찰독재정권’이라는 야당의 구호에 힘을 실어줬다. ‘조국 사태’ 당시의 먼지털기식 수사와 대조되는, ‘살아 있는 권력 수사’ 뭉개기는 조국혁신당 열풍의 풀무가 됐다. 검사 정치의 토양이자 수단이었던 검찰은 수사-기소권 완전 분리와 민주적 통제 강화라는 근본적인 개혁 요구를 스스로 불러냈다. 검찰정권 2년 천하는 사실상 끝났다. 윤 대통령이 검사 정치를 고집한다면 더 큰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것이고, 검찰 역시 반성과 쇄신에 나서지 않으면 역사에서 퇴장하는 신세가 될 수 있다. 총선에서 확인한 민심의 무서운 경고다. 출처:한겨레신문, 편집:빛고을신문

변한 것과 변해야 할 것 [세상읽기]

변한 것과 변해야 할 것 [세상읽기]

국회의원 배지 - 한겨레신문 서복경 | 더가능연구소 대표 22대 국회의원선거가 끝났다. 그리고 정치의 새로운 주기가 시작되었다. 우리 헌법과 법률이 법정 선거주기를 두는 이유는 정당, 정치인과 유권자 모두에게 이전 정치패턴을 정기적으로 ‘새로 고침’ 하도록 강제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는 무엇을 바꾸어놓았을까? 우선 22대 국회의 원내 구성을 들 수 있겠다. 2020년 선거로 의석을 얻은 정당은 5개였던 반면, 이번 선거 결과로 유권자가 만든 원내정당의 수는 7개가 되었다. 지난 총선 지역구 투표에서는 3개 정당이 의석을 얻었고, 정당 투표를 통해서는 5개 정당이 의석을 얻었다. 선거 뒤 본정당과 소위 ‘위성정당’의 통합을 거쳐 미래통합당, 더불어민주당, 정의당, 국민의당, 열린민주당이 남아 21대 국회를 시작했다. 5월30일, 22대 국회는 더불어민주당, 국민의힘, 조국혁신당, 진보당, 개혁신당, 새진보연합, 새로운미래(의석수순)의 7개 정당 체제로 출발할 전망이다. 거대 양당 이외 정당들은 어느 한 진영에 속하여 국회 운영에 독립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거나, 결국 통합될 것이라고 인식되기도 한다. 물론 정당의 수가 늘어난다는 것이 반드시 독립적인 원내 목소리를 늘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번은 다를 것 같다. 조국혁신당, 개혁신당은 선거 과정에서 누차 더불어민주당이나 국민의힘과 ‘통합은 없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조국혁신당은 더불어민주당보다 선명한 정부 견제 노선을 취하겠다고 했고, 개혁신당은 국민의힘과는 다른 보수를 표방하고 있다. 진보당, 새진보연합도 나름 독립적인 목소리를 내야만 하는 절실한 이유가 있다. 21대 국회보다는 더 다양한 주장과 지향이 각축하는 국회가 될 것 같다. 이번 선거가 만들어낸 또 다른 변화는 원내 리더십 그룹 정치인들의 면면이 빚어낼 역동성이다. 제1당 최다선 의원으로, 가장 유력한 국회의장 후보인 추미애 의원이 있다. 그가 그동안 표방한 바를 실행한다면 민주화 이후 역대 국회의장 가운데 없었던 국회 수장 모델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나경원 의원, 안철수 의원은 그 당 다음 지도부가 어떻게 구성되든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중요한 리더십 역할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이재명 대표는 끊임없이 리더십을 시험받았던 21대 국회에서와 다른 출발점에서 22대 국회 제1당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는 원내 진입이 처음이지만, 이미 대한민국 원내 제2당을 움직였던 경륜 있는 정치인이다. 역시 원내정치는 처음이지만 자당 내 강력한 리더십을 구축하고 있는 조국 대표도 있다. 큰 두 정당 지도부의 갈등과 교착으로 점철되었던 21대 국회와는 다른 국회 운영 모습이 나타날 것 같다. 세번째 변화는 당선된 국회의원들의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집권당 외에 모든 정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윤석열 정부를 견제하겠다’는 다짐을 반복하면서 선거 캠페인을 지나왔다. 당선자 개개인의 특성을 논외로 하더라도 캠페인 과정에서 유권자들에게 반복했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21대 국회의원들보다 더 강한 정부 견제 목소리와 행동을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에서 열거한 모든 변화를 압도하는 새로 고침은 4월10일 이전과 이후 달라진 시민들일 것이다. 선거는 엄청난 규모의 사람들이 쏟아져 나와 붐비면서 대량의 정보가 사방으로 흘러다니는 큰 장날과 흡사하다. 이전까지 ‘생활에 바빠서, 관심이 없어서’ 정치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알지 못했던 시민들은 선거 장이 서면 대량의 정보를 체계적으로 접하고 판단을 형성하게 된다. 또한 충돌하는 다양한 정보들을 서로 나누고 해석하면서 이전에 없던 새로운 연결망을 새로 만들거나 기존 연결망을 더욱 강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기적인 선거를 한번 거친 시민들은 이전과 질적으로 다른 정보와 판단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사면권, 법률안 거부권, 예산편성권과 집행권, 국무위원 임면권, 70만이 넘는 국가직 공무원들에 대한 직간접적인 임면권, 시행령 제정권을 가진 사람은 여전히 윤석열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대통령은 집권당 의석수가 21대와 유사해 보인다고 해서, ‘이후 정치가 4월10일 이전과 비슷하게 돌아갈 것이며 하던 대로 해도 괜찮다’는 생각에 빠지지 말고 서둘러 국정 기조와 국정운영 태도를 바꿔야 한다. 출처:한겨레신문-

왜 더 많이 움직여야 하는가?

왜 더 많이 움직여야 하는가?

일상 활동 외에 운동이 왜 더 필요한가 우리 현대인의 먼 조상들은 수백만 년 동안 수렵, 채집 생활을 활발하게 했고 그와 함께 뇌를 발달시켰다. 동물을 사냥하기 위한 몸놀림을 위해 뇌가 진화했고, 뇌는 몸에 더욱 복잡하고 효율적인 움직임을 명령했다. 이것이 바로 뇌가 운동을 통해 최적화될 수 있는 근본적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우리 생활을 보면 컴퓨터와 스마트폰 앞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신체 활동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우리의 뇌는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통해 새로운 것을 경험하도록 진화하지 않았다. 인간의 몸은 생존을 위한 움직임에 가장 적합하게 진화하면서 발달된 것이다. 그런데 끊임없이 먹을 것을 찾아 활발하게 돌아다니던 생활방식에서 농업 사회와 산업 사회를 거쳐 디지털 사회로 바뀌게 되었다. 휴대폰의 앱을 열고 클릭 몇 번만 하면 음식이 바로 배달되는 편리한 생활이지만 스트레스, 불안, 우울 등 정신적 문제는 더욱 증가하고 있다. 신체 활동이 줄어든 생활방식이 우리 뇌의 대응능력을 감소시키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건강한 신체와 정신을 위해, 앉아 있는 시간을 늘리는 것은 지금 우리의 선택지가 아니다. 운동은 최고의 예방접종 지금까지 축적된 많은 연구들에서 과학자들은 뇌의 대응력을 높여주는 최고의 예방접종은 ‘운동’이라고 강조한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은 곧 신체 활동이 뇌 건강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운동이란 일상생활에서 발생하는 모든 신체의 움직임을 포함하는 신체 활동의 한 범주에 속하며, 체력을 유지하고 향상시키기 위해 계획적으로 반복 수행하는 구조화된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운동을 규칙적으로 해야 하는 이유는 뇌를 최적화하고 뇌의 대응력을 높이기 데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도 다리가 튼튼하면 뇌의 기능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연구가 있다. 영국 킹스 칼리지 런던 연구팀(Steves et al., 2016)은 324명의 여성 쌍둥이(43~73세)들을 대상으로 10여 년간 연구를 진행한 결과, 걷기 등의 활발한 신체 활동을 통해 튼튼한 다리를 가진 대상자들은 운동하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인지 능력이 더 뛰어나고 노화와 관련된 뇌 변화도 훨씬 적었다. 이는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여 다리를 튼튼하게 유지하면 치매를 예방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그림 1). 우리의 뇌 속에는 뇌유래 신경영양인자(Brain-derived Neurotrophic Factor:BDNF)라는 뇌의 천연비료와 같은 물질이 있다. 나이에 상관없이 BDNF는 뇌 건강에 매주 중요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우울증 환자나 자살자의 뇌에는 BDNF 수치가 낮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즉각적으로 BDNF의 생산량이 줄어든다. 이러한 BDNF 생성에는 규칙적인 운동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이상과 같은 내용만 보더라도 운동의 효과는 뇌 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몸에서 가장 큰 장기인 모세혈관, 길이는 10만km 우리 몸이 건강하려면 영양소와 산소를 운반하는 혈관의 역할이 중요하다. 혈관이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동맥과 정맥이다. 그러나 혈액의 영양분과 산소를 온몸 세포에 전달하고 불필요한 이산화탄소나 노폐물을 회수하는 것은 전체 혈관의 99%를 차지하고 길이가 약 10만km나 되는 ‘모세혈관’이다. 혈액순환의 주역인 모세혈관은 생명과 연관된 물질을 크기별로 구분하고 여과하는 천연 혈액 필터이며, 우리 몸에서 가장 큰 장기라고 할 수 있다. 미세한 혈관 내에서 이루어지는 모세혈관의 혈류 활동은 인체 건강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이러한 건강을 좌우하는 모세혈관도 나이와 함께 노화한다. 고혈당이나 고혈압 등 생활습관병은 모세혈관 내벽에 노폐 물질이 쌓여 혈관의 탄력을 잃게 만들고, 유령 혈관이 되면 그 기능을 잃게 된다. 40대부터는 신진대사가 점차 감소하여 사멸하는 혈관 내피세포가 증가하며, 60대에는 모세혈관의 수가 40% 정도 감소한다. 노화로 모세혈관의 수가 줄어들면 불필요한 노폐물을 제대로 배출하지 못하고 체내에 쌓이게 하여 주요 장기의 신진대사 정체를 유도함으로써 다양한 질병과 증상을 초래하게 된다. 또한 뇌에서 모세혈관의 탄력성이 저하되고 혈관 수가 감소하면 인지기능 저하나 치매 유발로 이어질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혈관 건강 촉진제, 산화질소 이렇게 인체 혈관은 우리의 건강과 생명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혈관 건강은 산화질소(Nitric Oxide:NO)의 역할과 깊은 관련이 있다. 산화질소는 신체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되는 기체 분자로 심혈관계, 신경계, 면역계의 조절에 관여하며, 노화를 예방하고 개선하는 기적의 물질이자 생명 물질로 알려져 있다. 산화질소가 우리 몸에 존재하고, 혈관이 확장하기 전 신호전달물질로 작용한다는 기전을 밝힌 것은 20여 년 밖에 되지 않는다. 1998년 루이스 이그나로Louis Ignarro 박사팀은 산화질소가 혈관을 이완시키고 확장시키기 위해 혈관 내피세포에서 생성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산화질소의 신호전달 메커니즘을 규명한 공로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전 세계적으로 산화질소에 관한 연구 논문은 단일물질로는 가장 많은 15만 편에 달하고 있다. 산화질소는 혈관 내피세포에서 주로 생성되어 즉각적으로 혈관을 확장시키고 혈액순환을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이로 인해 인체의 60조 개 세포에 산소와 영양소를 효율적으로 공급해줌으로써 세포 내 에너지 대사가 효율적으로 일어나게 한다. 이러한 산화질소는 혈관 내피세포에서만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뇌와 폐의 신경세포에서도 생성이 되어 뇌 질환이나 기관지 및 폐 질환 치료에 활용되고 있다. 그 외에 산화질소는 생식기의 신경세포에서 생성되어 성기능 장애를 개선하고, 백혈구에서 생성되어 면역기능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혈관은 나이와 함께 노화하고 기능도 저하됨으로써 혈관 내피세포에서 생성되는 산화질소의 생성량도 노화에 의해 감소될 수밖에 없다. 산화질소 생성을 돕는 효소의 분비가 20대에 비해 40대에는 절반으로 줄어들고, 이후 나이가 들수록 산화질소 생성이 급격하게 줄어든다. 나이 들어도 산화질소 생성을 촉진시킬 수 있다면 노화를 지연시키고 각종 질병을 예방함으로써 젊음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최근 특정 부위 활동이 증가했을 때 뇌가 어떻게 해당 혈관에 확장 신호를 보내 뇌의 모세혈관을 제어하는지 그 메커니즘을 밝힌 연구 논문이 2021년 7월 <사이언스 어드밴시스Science Advances>에 실렸다. 이 연구에서 모세혈관 내벽 세포에 유입하는 칼슘이 늘어나면 산화질소가 생성되어 모세혈관을 확장하고 혈류량도 늘어나는 것을 확인했다. 혈류량이 늘어야 하는 뇌의 특정 영역에 필요할 때 혈액이 공급되지 않으면 신경세포가 스트레스로 손상되어 인지기능 저하와 기억장애를 유발할 수 있다. ▲ 여성 쌍둥이를 대상으로 한 연구(출처 : Gerontology, 2016) 규칙적 운동이 산화질소 생성을 촉진한다 인체 내에 산화질소 생성을 촉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규칙적인 운동이다. 녹황색 채소 같은 식품을 섭취하는 것도 산화질소 생성을 촉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온전한 식품 섭취에 한계가 있다면 산화질소 생성을 촉진하는 산화질소 대사체와 같은 건강기능식품 섭취도 효율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산화질소 생성을 촉진하기 위해 의학박사 잭 부시Zach Bush는 짧은 시간 동안 신체의 16개 주요 근육을 운동시켜 전신의 산화질소 레벨을 높이고, 이로써 혈액순환을 촉진하는 ‘산화질소 덤프운동(Nitric Oxide Dump)’을 개발했다. 산화질소 덤프운동은 스쿼트, 번갈아 팔 들어 올리기, 뛰지 않고 하는 팔 벌려 뛰기, 숄더 프레스 등 네 가지 동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세트당 10회씩 3~4세트를 실시하며, 하루 세 번 최소 두 시간 간격으로 하기를 권한다. 어느 정도 체력이 붙으면 반복 횟수를 20회까지 늘릴 수 있으며, 호흡은 입이 아닌 코를 통해서만 해야 하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 운동은 장소의 구애 없이 자세와 속도에 초점을 두고, 움직이는 관절과 근육 단위에 산소 부족을 발생시켜 산화질소 재생성을 촉진하는 고강도 인터벌 운동법이다. 다양한 연구에서 제2형 당뇨병 환자들의 심혈관계 합병증 위험을 줄일 수 있고, 노화로 인한 심혈관대사증후군 위험 요소를 줄이며, 복부와 내장 지방 침착물들을 줄이는 데 매우 효율적인 운동 방법임을 입증하고 있다. 우리 몸의 혈관은 상처가 나도 통증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혈관은 침묵의 장기라 불리기도 한다. 뇌졸중, 심근경색, 협심증 등은 대표적인 혈관질환이지만 진행되는 정도를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평소에 건강한 생활습관과 규칙적인 운동을 생활화하여 혈관질환을 예방할 필요가 있다. 식사를 매일 규칙적으로 해야 하듯 운동도 그렇다. 일회성 운동이 아닌, 평생 꾸준히 하는 생활습관으로 만들어야 건강을 유지하고 증진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일상적인 활동을 할 때도 산화질소가 발생되어 혈관 확장이 일어나지만, 온몸의 모세혈관까지 자극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적극적인 운동으로 전신의 혈관과 신경계를 자극하고 단련시킬 때 건강은 한층 업그레이드 될 것이다. 뇌 건강을 보장하는 근육 테크 모세혈관을 늘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걷기 같은 유산소 운동과 근육 운동을 병행하는 것이다. 많은 양의 산소를 몸속에 공급하는 유산소 운동으로 단련된 근육을 적색근(red muscle)이라고 한다. 이 적색근은 모세혈관이 잘 발달되어 있고 미토콘드리아가 많이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빠르게 걷기와 같은 유산소 운동은 산소와 영양소를 공급받기 위한 새로운 모세혈관을 생성하게 한다. 운동을 하면 동맥에서 모세혈관, 정맥까지 전체 혈관의 혈류속도가 증가한다. 특히 마라톤과 같은 격렬한 유산소 운동은 활성산소를 생성하기 때문에 역효과가 날 수 있다. 모세혈관의 혈류가 과도하게 빨라지면 물질교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다시 정맥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정맥은 근육의 움직임에 의해 압력을 받아 혈액이 심장으로 흘러가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걷기나 달리기 같은 운동은 정맥에 있는 혈액을 심장으로 돌려보내면서 모세혈관의 혈류 순환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웨이트트레이닝 같은 무산소적 근력운동을 통해서도 근육세포가 산소를 대량으로 원하기 때문에 새로운 모세혈관을 생성할 수 있다. 근육량은 40세부터 매년 0.5% 정도 감소하기 시작한다. 특히 신체에서 가장 큰 근육인 허벅지 앞쪽 대퇴사두근의 근육량 감소가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가장 큰 근육인 대퇴사두근과 두 번째 큰 근육인 엉덩이 대둔근의 근육량 감소가 일어나지 않도록 스쿼트와 같은 운동이 필수적이다. 우리 몸의 근육은 약 2/3가 하체에 집중되어 있다. 하체의 근육이 튼튼할수록 치매나 알츠하이머 같은 인지장애를 예방하고 뇌 건강을 지킬 수 있다. 뇌 건강을 보장하는 근육테크, 당장 시작해보자. 출처:브레인미디어 글. 심준영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뇌교육학과 교수)


교사 이영주 씨, 삶의 끝 다른 이를 위해 내 몸 써지길 마지막까지 사랑을 나누는 참 스승으로 떠나.

교사 이영주 씨, 삶의 끝 다른 이를 위해 내 몸 써지길 마지막까지 사랑을 나누는 참 스승으로 떠나.

한국장기조직기증원(원장 이삼열)은 5월 11일 원광대학교병원에서 이영주(57세) 님이 뇌사장기기증으로 4명의 생명을 살리고, 인체조직기증으로 백여 명의 환자에게 삶의 희망을 전하고 하늘의 별이 되었다고 밝혔다. 이 씨는 5월 7일, 7시쯤 교장 승진을 위해 연수를 받으러 집에서 짐을 챙기던 도중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어 치료받았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뇌사상태가 되었다. 이 씨는 뇌사장기기증으로 심장, 간장, 신장(좌, 우)을 기증하여 4명의 생명을 살리고, 인체조직기증으로 백여 명 환자의 기능적 회복을 도왔다. 이 씨는 중, 고등학교에서 영어 선생님으로 교직 생활을 하다가, 3년 전에 교감 선생이 되어 교장 승진을 앞두고 있었다. 평소 학생들을 자식처럼 아끼고, 특히 생활이 어렵고 학교생활에 적응을 못 하는 학생들에게 더 마음을 많이 쓰는 선생님이었는데, 스승의 날을 며칠 앞두고 떠나게 되어 가족과 주변 사람들이 더 마음 아파했다. 가족들은 평소 이 씨가 자신이 죽으면 장기기증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라는 이야기를 자주 하였고, 장기기증을 못 한다면 시신 기증을 통해서라도 의학 교육과 의학 인재 양성에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전해왔기에 그 뜻을 이뤄드리고자 기증을 결심했다. 군산시에서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난 이 씨는 나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며, 본인이 손해 보더라도 남을 위해 행동했다. 또한, 사람을 대하는데 선입견 없이 모두에게 자상하게 대하며,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이 씨는 책과 신문 읽는 것을 좋아했고, 건강을 위해 테니스와 배구를 즐겨 했다. 쉬는 날에는 자녀들과 함께 여행을 가고 다양한 경험을 해주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자상한 아버지였다 또한, 어려운 이웃을 위해 후원도 20년 넘게 하며, 늘 어려운 사람을 보면 먼저 나서 도움을 주곤 했다. 이 씨의 아들, 이겨례 씨는 “아빠 아들 겨레에요. 떠나시는 날 많은 분이 아빠를 위해 울어주셨어요. 타인을 위해 헌신하고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 이제는 우리가 모두 기억하고 행동할게요. 감사합니다. 너무 사랑합니다.”라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 이삼열 원장은 “생명나눔을 통해 4명의 생명과 백여 명의 환자의 삶의 질을 개선해 주신 기증자와 유가족에게 감사드립니다. 생명나눔은 사랑이자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은 한 분의 생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자료제공:한국장기조직기증원, 편집:빛고을신문

‘따뜻한 가족 행복한 전남’ 만들기 다짐

‘따뜻한 가족 행복한 전남’ 만들기 다짐

전라남도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지난 10일 나주빛가람 호수공원에서 ‘따뜻한 가족, 행복한 전남’이라는 주제로 ‘2024년 가정의 달 기념행사’를 개최했다.나주시가족센터에서 주관한 기념행사에는 유미자 전남도 여성가족정책관, 윤병태 나주시장, 신정훈 국회의원, 이재태·김호진·최명수·오미화·김미경 전남도의회 의원, 가정의 달 기념 유공자, 시군가족센터, 나주시민 등 800여 명이 참석했다.식전행사로 완도군가족센터 프로그램 참여 아동으로 이뤄진 댄스팀에서 치어리딩 공연, 나주시 아동들의 태권무 공연이 진행됐다. 이어진 기념식에서는 가족 가치 확산과 가족관계 증진에 기여한 8명의 유공자에게 도지사 표창을 수여했다.특히 이날 행사에는 근로자의 일·가정 양립 지원 등 ‘가족친화제도’를 모범적으로 운영한 기업 6곳의 대표에게 가족친화 인증기업 현판 수여식을 진행해 행사의 의미를 더했다.또한 다채로운 체험부스를 운영해 가족 얼굴 액자 꾸미기, 북아트 체험활동, 디지털 인공지능(AI)교육 등 다양한 체험과 즐길거리를 제공했으며, 다문화세계전통놀이 및 의상체험 부스 운영으로 가족단위 참여자에게 즐거움을 더했다.참여한 한 도민은 “가족과 함께 다양한 체험활동을 함으로써 가족 간 소통과 유대가 더욱 깊어지는 계기가 됐다”며 “가족이 함께하는 행사가 앞으로도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유미자 전남도 여성가족정책관은 “인간의 성장을 위한 소중한 공동체이자 생활을 공유하고 삶의 행복을 나누는 동반자는 바로 가족”이라며 “소중한 가정이 건강하게 유지돼 도민이 행복한 삶을 누리도록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포용할 수 있는 맞춤형 행복시책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전남도는 초저출생 사회, 인구위기 극복을 위해 일·생활이 균형을 이룬 사회를 만들어 가며, ‘아이 낳고 키우기 좋은 행복 전남’을 가꿔가는 등 가족친화 정책을 계속 발굴해 추진할 계획이다. 빛고을신문-

광주시, 고령자·장애인 보조기기 개발 추진

광주시, 고령자·장애인 보조기기 개발 추진

광주시가 고령자와 장애인을 위한 맞춤형 보조기기 개발을 추진한다.광주광역시(시장 강기정)는 보건복지부의 ‘장애인·노인 자립생활을 위한 보조기기 실용화 연구개발사업’ 공모에 선정돼 오는 2027년까지 총 12억6000만원(국비 11억2500만원)을 투입해 고령자와 장애인을 위한 맞춤형 보조기기 개발에 나선다.생활 맞춤형 보조기기는 고령자와 장애인의 자립 및 일상생활에 필요하지만, 개인별 상황에 따른 요구사항이 각기 달라 민간시장 중심의 보조기기 산업화가 어려운 한계가 있었다.광주시는 이에 공공영역에서 보조기기 사용자의 장애 유형, 신체 활용 능력 등을 고려해 3D 프린터를 이용한 맞춤형 보조기기 제작·보급에 나선다.‘장애인·노인 자립생활을 위한 보조기기 실용화 연구개발사업’에는 광주 고령친화산업지원센터가 현장 실증, 사용성 평가, 인공지능(AI) 융합형 보조기기 개발 등을 수행하고, 전남대학교 산학협력단이 재활 공학을 기반으로 메이커스페이스를 운영, 개발된 보조기기를 양산화하는 원스톱 개발 체계를 구축한다.광주시는 광주광역시보조기기센터, 호남권역재활병원, K-하이테크플랫폼 등 산·학·병·연을 중심으로 ‘지역 기반 협의체’를 구성해 지역 내 고령자와 장애인의 수요를 적극적으로 발굴·반영, 개발 과정에서의 효과성을 중점적으로 검증할 계획이다.또 개발 과정과 설계도를 개방해 앞으로 보조기기의 개선과 재제작이 가능하게 할 계획이다.한편 광주지역에 등록된 장애인(약 7만명)과 65세 이상의 고령자(약 22만명)는 광주 전체인구의 약 20.5%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장애인과 고령자 보조기기 사용자 중 24%가 자신에게 맞는 보조기기가 없어 불만족스럽다고 답변해 이들의 자립생활을 위한 보조기기 개발·보급이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김용승 인공지능산업실장은 “이번 사업은 취약계층을 위한 ‘따뜻한 기술 개발’의 대표적인 사례라 될 것”이라며 “인공지능 융합형 보조기기 기술 개발과 이를 기반으로 하는 신산업 창출을 모색하는 기회로 삼겠다”고 말했다. 빛고을신문-

평생 아픈 몸으로 살아온 30대 최성철 씨 생명나눔 실천

평생 아픈 몸으로 살아온 30대 최성철 씨 생명나눔 실천

생전의 최성철씨 - 한국장기조직기증원제공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은 최성철(37세) 님이 뇌사장기기증으로 생명을 살리고 하늘의 별이 되었다고 밝혔다. 최 씨는 지난 3월 21일, 저녁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급히 병원으로 이송하여 치료받았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뇌사상태가 되었다. 최 씨는 뇌사장기기증으로 신장(좌, 우), 간장, 안구(좌, 우)를 기증하여 5명의 생명을 살렸다. 가족들은 최 씨가 고등학교 시절에 학교 폭력으로 정신질환이 생겨서 장애 2급 판정을 받아 자유로운 활동을 못 한 것이 늘 마음이 아팠다. 기증을 통해 다른 생명에 가서 새로운 것을 보고 밝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증을 결심했다. 서울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난 최 씨는 밝고 활발한 성격이었고, 자신보다 남에게 양보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져 남을 돕는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어 했다. 최 씨는 아픈 몸이기에 많은 것들을 포기하고 살아야 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노력을 통해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여 가족들을 챙겼다. 가족들은 최 씨가 경주 여행을 너무나 가고 싶어 하여 4월에 가족 여행 준비하고 있었는데, 함께 여행가고자 한 달에 하늘나라로 먼저 떠나 더 큰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최 씨의 어머니 김정숙 씨는 “성철아. 생전에 못 한 거 하늘나라에 가서 뭐든지 다 하길 바래. 편히 잘 쉬고,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기억되어 떠나서 고마워. 내 아들 사랑한다. 성철아 사랑한다.”라고 말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 변효순 원장 직무 대행은 “생명나눔을 실천한 기증자께서 삶의 끝이 아닌 또 다른 생명에서 밝은 세상을 함께 하길 희망합니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은 기증자와 기증자 유가족의 이러한 따뜻한 마음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자료제공:한국장기조직기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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