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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언론실천선언 50년] 동아·조선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지난 1975년에 자유언론실천운동을 벌였던 언론인(동아일보 113명, 조선일보 32명)을 대량 강제 해직시켜 놓고 50년이 되도록 사과 한마디 없이 지내고 있다. 박정희 유신 독재정권의 강압으로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해도 명색이 한국을 대표한다고 스스로 내세우는 언론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조그만 성냥공장도 아닌 언론 대기업이 입이 열 개라도 어떻게 변명하겠는가. 이 특권 족벌 언론을 대상으로 해고무효 소송을 해도 대법원을 비롯한 각급 법원이 우리에게 강요한 것은 패소 판결뿐이었다. 국가 기관인 진실과화해과거사정리위원회가 동아일보 측에게 화해를 권고했으나 박정희의 딸 박근혜 정권과 사법농단 흥정을 벌이고 있던 양승태 대법원은 동아일보 측에게 승소를 안겨주었다. 당시 동아일보의 경영악화로 대량 해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이용훈 직전 대법원장이 인촌 김성수 기념회 이사장을 맡고 있었다. 1987년 민주항쟁의 부분적 승리로 직선제 개헌이 이뤄져서 이후 10명의 대통령의 시대를 살아왔지만 유독 동아·조선 양대 족벌 언론은 민주화의 과실까지 가로채면서 민주사회의 최상위 포식자로 다시 군림했다. 이른바 민주 정권들까지 이들 사기업 족벌언론들에게 굴종하였다. 이 두 족벌언론은 해방 이후 신문을 복간할 때에도 일제 식민 지배 시기의 친일부역에 대해서도 한 마디 사과 없이 다시 신문을 냈다. 오히려 항일했다고 거짓말했다. 이 두 신문은 중요한 정치적 계기마다 독재를 두둔하여 한국의 민주화에 역행했으며 남북화해에 찬물을 끼얹고 분단 대결을 조장해 왔다. 광화문 한복판에 조선과 동아가 버티고 서 있는 한, 우리 국민은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에 언제나 역풍을 걱정해야 할 것이다.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사기업 ‘동아·조선 없는’ 세상에 살아보고 싶다. 창간 50주년 특집호 준비하면서 ‘동아 실체’ 파악 수습기자 생활의 중반을 넘어갈 즈음인 1969년 4월에 창간 50주년인 1970년 4월 1일의 특집판을 준비하는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조사부에 비치돼 있는 창간호부터 당시까지의 동아일보를 모두 열람하여 나라와 민족에 대한 동아일보의 공헌을 찾아내 정리하라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마이크로필름도 디지털 저장도 없었던 시절이라 일일이 찾고 메모했다. 우리 젊은 기자들에게 동아일보는 ‘반독재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는 민족지’로 알려져 있었고 그래서 언론인으로서 동아 기자로 일하는 것을 가장 보람 있는 일로 알고 있었다. 제대로 된 한국언론사 책 한 권도 없었고 동아·조선을 비판하는 것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두 달 남짓 1920년 4월 1일부터 1969년까지 동아일보를 열람한 뒤 나는 혼란에 빠졌다. 내가 알고 있던 동아일보와 일제 치하의 동아일보가 다른 신문이었고 해방정국의 동아일보도 민족지라면 할 수 없었던 분단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창간 직후 무장항일운동과 상해임시정부를 깎아내리면서 자치운동의 정당성을 주장하거나 사주 김성수가 일본군 참전을 독려하는 등 중일 전쟁 이후의 사례, 해방 후 모스크바 삼상회의 가짜보도 등 몇 가지는 내게 큰 충격을 주었고 조용히 수습 11기 동기생들과 논의했다. △ 2023년 3월 17일 강제축출 48주년에 동아일보 앞에서 피켓시위를 벌이고 있다. 왼쪽부터 이명순, 김동현, 박종만, 필자 이부영, 허육, 이영록 위원들. 다만 1951년에 부통령에 당선된 사주 김성수가 이승만의 권력욕 때문에 일어난 부산 정치파동에 항의하여 부통령직에서 사임하면서 동아일보가 이승만에 대한 격렬한 비판 논조를 펴게 되었다. 이때부터 동아일보는 4.19혁명에 이르기까지 반 이승만 논조를 펴면서 한국의 야당지로 부동의 위치를 차지했다. 그러면서도 조봉암 사형 등에는 냉담했다. 이렇게 동아일보에 대한 과대한 착시현상이 일어났으며 나 자신도 착시의 포로가 돼 있었고 뒤늦게 환멸감에 시달려야 했다. 언론노조·자유언론실천운동 그리고 동아일보 문화부 동아 문화부에 바치는 나의 헌사를 빼놓을 수 없다. 동아 언론노조와 자유언론실천운동에서 문화부 구성원들은 헌신적 역할을 했다. 이에 대해 우리 동아투위 위원들도 크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대훈 부장 한 분을 제외하고 전 부원들이 참여했고 해임되었다. 권영자, 장윤환, 김병익, 서권석, 이길범, 홍휘자, 심정섭 등 일곱 분과 나까지 모두 여덟 명이다. 권영자 차장(수습 1기)은 1974년 3월 동아언론노조 창립 때부터 함께했다. 3.17 대량해임 이후 즉시 발족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의 초대 위원장도 서슴지 않고 맡아주었고 6개월 동안 계속된 동투의 아침 회사 앞 도열시위에 앞장섰다. 권력의 탄압으로 야기된 백지광고와 대량해직으로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기자, 피디, 아나운서들의 사기를 다독이면서 이끌어준 큰 언니의 소임을 감당해주셨다. 동아노조가 조합원수를 늘려가는 과정에서 민청학련 사건 등 유신 폭압에 언론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현실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되면서 누가 자유언론운동의 대표주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고심하게 되었다. 몇몇 선배들이 거명되었으나 문화부의 연극·영화 담당하는 장윤환 수석기자로 논의가 모아졌다. 마침 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장이 교체되어야 했으므로 장윤환 선배(수습 3기)를 추대하기로 했다. 10.24 자유언론실천운동은 장 선배의 리더십에 따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때까지 ‘언론자유 선언’이 되풀이 발표되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장 선배는 자유언론을 ‘실천하자’는 투쟁을 제안했다. 수습 3기 선배의 결기 앞에 후배들은 숙연하게 따랐다. 자유언론실천운동이 본격적으로 벌어질 무렵, 기자협회 회장이 유신정권의 부처 대변인으로 옮겨가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이 기회에 기자협회도 바꿔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동아일보의 문학담당 기자로 이미 문학계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김병익 선배(수습 6기)에게 부탁드리기로 했다. 같은 문화부에 일하는 후배였기에 내가 김 선배의 의중을 타진했다. 김 선배는 의외로 선선히 받아들였다. 기협 부회장에는 나의 대학 동기 조선일보의 백기범과 중앙일보의 홍사덕에게 응낙을 받았다. 기협 회장단이 드림팀으로 구성되었다. 언론계에 들불처럼 번지고 있던 자유언론실천운동은 기자협회도 쇄신하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 2023년 7월 중순 뉴스타파 옥상정원에서 동아·조선 양 투위원들 16명이 2024년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에 앞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서권석 선배(9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종교계를 담당했던 서 기자는 이미 유신이 시작되면서 반유신 종교계 움직임을 취재하고 있었다.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군사재판이 열리자 신문에 나가지 않아도 미리 취재 노트를 만들었다. 명동성당과 기독교회관의 인권 기도회를 취재, 민청학련 사건의 내용과 인권탄압을 고발하는 기사를 써서 10.24선언의 기폭제 노릇을 했다. 이길범 기자와 홍휘자, 심정섭 여기자들도 정성껏 돕고 참여했다. 정자환 선배(수습 6기)도 기억에 남는다. 미국 하와이대에 유학 중에 1974년 초에 귀국하여 문화부에 잠시 복귀했는데 동아 언론노조가 발족했다. 노조 간부들에 대한 무더기 해임이 일어났고 1차 대책위원회도 다시 해임 무기정직 처분을 받았다. 정자환 기자는 2차 대책위에 이름을 올렸다. 다시 유학길에 올라야 할 정 선배가 선뜻 대책위에 이름을 올린 것을 잊지 못하겠다. 나는 수습 11기로 1972년 후반에 문화부에 합류했다. 국제관계 학술회의와 대학신문을 취재했고 인권변호사와 참여계 문학인들을 취재했다. 김병익 선배가 후일 문학과지성 계열의 문인들을 담당했다면 나는 창작과비평 계열의 문인들을 많이 만났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창립을 청진동에 있던 이문구가 편집을 담당했던 <한국문학>에서 시작했으므로 동아의 자유언론운동과 거의 동시에 진행됐다. 나는 동아 언론노조의 섭외부장으로 일한 탓으로 자유언론실천운동에서도 대변인으로 일했다. 대변인 활동으로 박정희 독재에게 미운털 광고 탄압과 사내 농성 그리고 대량 해직사태로 이어지면서 많은 외신기자들이 동아일보 편집국으로, 회사 밖으로 찾아와서 브리핑해주고 인터뷰를 해야 했다. 당시 워싱턴포스트의 돈 오버도퍼, 뉴욕타임스의 리차드 헬로런 등 미국과 유럽 일본 등 주로 서방 언론 대기자들의 취재요청에 응해야 했다. 오버도퍼 기자는 한 페이지에 이르는 장문의 논설기사에서 '정보기관이라는 유령이 동아일보에 출몰하고 있다…'라는 공산당 선언의 첫 구절을 인용하는 글을 남겼다. △ 1975년 1월 중순, 필자가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워싱턴포스트의 돈 오버도퍼 기자와 회견하고 있다. 후에 프레이저 보고서로 유명해진 도날드 프레이저 미 하원의원 그리고 AP통신의 존 로더릭 부사장을 만나 브리핑한 것으로 박정희 정권에게 두고두고 미운 털이 박히게 되었다. 후에 민주화운동에서 활동하게 될 종교인, 인권변호사, 문화예술인 학자들을 폭넓게 알게 되었다. 동아 문화부는 언론노조와 자유언론실천운동이 벌어지는 동안 그 중심 역할을 했다. 동아투위원들은 내가 점잖은 문화부를 오염(?)시켰다고 진반농반을 했다. 동아에서 대량 강제해직이 일어나기 직전에 민청학련 사건으로 중형을 받았다가 풀려난 김지하 시인의 옥중수기 ‘고행-1974’가 3회 시리즈로 실려 큰 반향을 일으켰다. 처가인 정릉의 박경리 작가 댁에 머물고 있던 김 시인을 나와 장윤환 선배가 함께 찾아가 소주를 마시면서 원고를 직접 쓰도록 했다. 인혁당 사건 사형수 하재완 씨가 고문으로 조작된 인혁당 사건에 대해 폭로하는 진술이 그 주요 내용이었다. 이 수기를 쓴 김 시인은 무기징역형을 복역하다가 나왔다. 아무리 중요한 기사라도 김 시인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했어야 했다. 김 시인은 곧바로 재수감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김 시인을 사형시키려 들었다. 나는 강제해직 직후 구속되었지만 나의 재판보다 김 시인의 운명에 더 마음을 써야 했다.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양심선언’이 여러 동지들의 노력으로 성사되어 그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나는 지금도 진실 보도보다는 생명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강제축출 이후의 몇 가지 단상들 3.17 대량 축출 사태 직후에 신문 방송 제작에 어려움이 닥치자 여러 갈래로 축출당한 동아투위원들을 복귀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김병관 광고부국장(김상만 사장의 장자)과 친분이 있는 김상현 의원이 김 부국장을 만난 다음 나를 만나 이렇게 전했다. “이부영을 비롯한 성유보, 박지동, 심재택 등 4명을 제외하고 모두 복직시킬 의사가 있다고 하는데 어떤가?”. 나는 “즉시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꼭 성사시켜달라”라고 했다. 나는 김상현 의원의 낙관론이 실현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김상만 사장은 박정희와 중앙정보부의 의사를 거역해서 축출 언론인들을 복직시킬 수 없다고 봤다. 이들이 복직하여 자유언론을 주창할 경우 화근을 다시 키우는 것으로 볼 것 아닌가. 박정희 독재가 끝나기 전에는 어려워 보였다. 나는 10.26 사태 이후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는 이유로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두 번째 구속되었다. 유신의 주인공이 죽었으니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해직 교수, 언론인과 제적학생들을 원상회복시키라는 요구였다. 당연한 요구를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구속이었다. 군사재판을 받으려고 서울구치소에 갇혀 있으면서 김재규 사건의 공범 박선호 의전실장을 내가 아는 구치소 간부를 통해 1980년 1월 하순경 비밀리에 만났다. 대통령 살해 사건의 사형수를 만나게 하는 건 그 간부로서도 모험이 따르는 일이었다. 박선호 씨를 만나 우선 그의 손을 잡고 의거에 감사한다고 인사했다. 시간이 급해서 용무를 말했다. 김재규 부장 책상 위에 현안 문서철로 동아투위 문서철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그는 분명히 있었다고 했다. 10.26 이전에 한꺼번에 10명이 구속되었으니까 중요한 현안(懸案)이었다는 것이었다. 꽤 두꺼운 서류철이었는데 김상만 사장이 정부에 제출하는 각서가 있었다고 했다. “… 다시는 불미한 일이 없도록 서약합니다…”는 내용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광고탄압을 풀면서 김 사장으로부터 서약서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재규 전 정보부장과 함께 박선호 씨는 1980년 5월 26일 서울구치소에서 교수형 집행으로 세상을 떠났다. 언협·민민협에 참여 결정, <말>지 발간 1981년 나는 대구교도소에서 야만적인 삼청교육을 받고 전두환의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으로 석방되었다. 박정희 독재가 끝나도 복직이 되지 않는 것을 보고 나서 군사독재정권이 종식되고 민주화가 성취되어야만 언론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우리 해직 언론인들은 유신독재 기간에는 야당 혹은 야당 정치인들과 연대하는 재야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언론인은 정치적 성향을 가진 민주화운동에 참여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처신했다. 그러나 5.18 학살을 저지른 전두환 군사독재를 물리치자고 벌이는 민주화운동에도 참여하지 않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를 비롯해서 동투·조투의 몇 사람들이 참여 쪽으로 기울었다. 1984년 초 노동 농민 문화예술 종교 교수 교사 등 조직 중심으로 결성된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에 김승훈 신부, 김동환 목사, 이부영 3인이 공동대표로 나섰고 이부영이 상임대표로 일하게 되었다. 언론계에는 동투 조투 80해직언론인 등 3개 그룹이 있었지만 민민협에 가입하지 않고 있었다. 1984년 봄에 신홍범(조투), 김태홍(80년해언협), 이부영(동투), 성유보(동투) 4인이 후배 몇 사람과 하남 검단산 산행을 함께 했다. 여기서 3개 단체와 출판인들이 합쳐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를 결성, 민민협에 가입하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전두환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에 언론인 단체가 참여하게 되었다. 나는 언협의 위원으로 민민협의 상임공동대표가 됐다. 전두환 신군부가 5.18민주화운동을 무력진압한 뒤에 1983년부터 전국의 대학가에서는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신문과 방송 등 언론은 거짓과 기만으로 가득 차고 넘쳤다. 언협은 매체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동투, 조투, 80년해언협 등 언협 내부에서 분담금을 마련하려 했지만 그럴 만큼 여유가 없었다. 1984년 나는 기독교방송 사장 김관석 목사를 찾아갔다. 그리고 언론 사정을 말씀드렸다. 며칠 뒤 김 목사는 적지 않은 금액인 2백만 원을 건네주었다. △ 2023년 6월 10일, 서울시청 동편 도로에서 열린 32회 민족민주열사 범국민추모제에서 오른쪽부터 고 송건호 선생(이부영), 고 안종필 위원장(박종만), 고 리영희 선생(신홍범), 고 정태기 위원장(성한표)의 영정을 모시고 참석했다. 언협 사무국장으로 <말>지 준비를 하고 있던 성유보 씨에게 전달했다. 편집실 마련 비용과 제작비였다. 당시에는 비용의 출처는 말하지 않았다. 1986년 <말>지가 전두환 정권의 보도지침을 폭로하여 신홍범, 김태홍, 김주언(당시 한국일보 기자) 세 언론인이 구속되었다. <말>지에 대한 폭발적 호응은 새 언론에 대한 전망을 가지도록 해주었다. 민주화운동이 고조되면서 서점에서도 <말>지가 팔리게 되었다. 그 뒤에는 제작비용을 걱정하지 않게 됐다. 1985년 12대 총선을 계기로 강경 야당이 등장하고 민주화운동이 결집하면서 직선제 개헌이 중심 과제로 제기되었다. 재야 중심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으로 집결되었다. 나는 문익환 의장, 계훈제 백기완 부의장을 모시고 사무처장으로 일했다. 동투에서는 성유보, 임채정, 김종철 위원이, 조투에서는 최장학 위원이, 출판인으로는 김승균 일월서각 대표가 참여했다. 민통련은 전국적 조직망을 통해 각지의 선명 야당 세력과 연대하여 직선제 개헌운동을 벌였다. 광역시도의 야당 시당에서 직선제 개헌 추진본부 현판식을 개최하면 민통련은 해당 지역 민주화운동 세력을 집결시켜 자연스럽게 집회와 시위를 만들어냈다. 남부 지역부터 북상하여 인천에서 대규모 집회를 가진 후 서울로 집중하려 했다. 1986년 5.3 인천 직선제 개헌투쟁을 전두환 정권은 대대적인 용공조작으로 탄압했다. 민통련을 배후조종한 세력으로 몰아 짓밟았다. 나는 6개월 동안 도피했다가 검거됐다. 이번에도 성유보 위원이 민통련의 사무처장으로 굳게 지켜내 오히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로 발전시켜 6월항쟁의 구심체 구실을 해냈다. 나는 영등포교도소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의 은폐조작 사실을 취재하여 6월 민주항쟁의 부싯돌 노릇을 했다. 이 전말은 다른 기회에 자세히 기술할 것이다. 마지막 재야 전민련-시민운동… 마음의 고향은 언론 1987년 6월 민주항쟁과 대통령 선거를 김천교도소 안에서 지켜봤다. 6.29 선언 이후 정치범 석방에서 제외돼 대통령 선거 패배 과정을 무력하게 바라봐야 했다. 양김의 분열과 감옥 안의 젊은이들의 NL vs PD 논쟁을 비교하면서 관찰하는 기회도 가졌다. 1988년 3월 노태우의 대통령 취임 기념 특별사면으로 풀려나는 감회는 씁쓸했다. 1968년 삼선개헌 이후 계속된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20년 투쟁이 패배로 끝난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한겨레신문 창간 운동은 대선 패배의 충격을 딛고 일어서서 “민주화운동은 한판 승부가 아닙니다”(강정문 동투 위원의 카피)라는 국민모금운동의 불씨를 되살리고 있었다. 1988년 5월 15일 한겨레신문 창간에 초청받아 갔다. 창간의 일원으로 서 있어야 할 나 자신은 손님이었다. 내가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동안 꾸준히 새 언론 준비를 해온 언협 주축 멤버들은 성공적으로 임무를 해냈다. 재야민주화운동 진영은 대선 패배의 후유증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88올림픽과 탈냉전 시대의 흐름은 한반도에도 전환의 바람을 일으켰다. 재야 민주화운동은 1989년 초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으로 결집하여 다시 나를 소환했다. 대선 현장에서 어느 쪽으로든지 가담하여 책임 소재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세력들은 타협의 산물로 나를 상임공동대표로 불러내려 했다. 아직 국가보안법이 그대로 있고 군사독재 끝물이 계속되고 있을 무렵, 전민련 운동은 낡은 냉전시대의 속죄양 운명을 면할 수 없었다. 문익환 목사의 89년 4.2 남북 평화공존선언 사건,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대파업 속에서 나는 다시 다섯 번째 투옥을 겪어야 했다. 어찌 보면 냉전시대 마지막 재야운동의 소임을 감당한다는 의미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마음의 고향은 언론에 머물고 있었다. 나의 정치 참여는 다른 기회에 다뤄볼 생각이다. 나는 2003년부터 장준하선생기념사업회,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동북아평화연대(우스리스크고려인문화센터설립추진위원회), 동아시아평화회의, 한일협정재협상국민운동본부, 그리고 최근에는 전국비상시국회의 등 시민운동에 허기진 사람처럼 관여해왔다. 나의 정치 참여에 대한 불만과 언론계 미복귀를 시민운동 참여로 갚으려는 듯했다. 그리고 2017년부터 동아 투위와 자유언론실천재단에 복귀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2019년 10월 24일, 삼보일배에 참여한 필자의 모습. 올해는 1974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이 되는 해다. 지금 50주년 기념사업이 진행 중이다. 처음 동아언론노조와 자유언론실천 운동에 투신했다면 50주년 마지막 기념사업까지 정성을 다해보려고 한다. 50주년 이후에는 탈 없이 역사 속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 간단히 살펴본 속절없고 부산한 나의 평생을 옆에서 지켜온 아내 손수향 님에게 고개를 들 수 없다. 1973년 장준하 선생을 대부로, 천관우 선생을 주례로 모시고 결혼했다. 1975년 3월 17일 해직되었고 6월에 구속되었을 때에는 한 살배기 딸과 막 태어난 아들이 딸려 있었다. 그리고 2년 7개월 만에 집에 돌아왔다. 때로는 아이들을 업고 안고 나를 면회 왔다. 돌아온 집은 천관우 선생댁 부근의 불광동 전셋집이 아니라 종로구 청운동 10평짜리 청운아파트였다. 두 어린 아이가 딸린 사람에게는 사글세 집을 주지 않아서 아껴서 연탄 때는 아파트를 샀다고 했다. 나의 친구들은 이부영이는 감옥에 가 있어야 재산이 늘어난다고 놀렸다. 부산에서 대학 교수직에 계시던 장모님은 주말 토요일에 상경하시어 아이들과 놀아주시고 일요일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시곤 했다. 우리 가족이 견디어낸 것은 오로지 장모님 덕택이었다. 정년 퇴직하신 뒤에는 우리 곁에서 지내시다가 돌아가셨다. 장모님 기일인 10월 초에는 지금도 양평 수목장림으로 성묘한다. ※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 준비위원회 후원NH농협 301-0240-3680-71 재단법인 자유언론실천재단 출처/자료:뉴스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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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 구조’ 오보, 국민·유족 갈라치기…세월호 보도 참사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2014년 4월16일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 오보를 전한 문화방송(MBC) ‘뉴스특보’ 장면. 문화방송 유튜브 갈무리 “세월호 보도 참사는 ‘전원 구조’라는 속보 자막에서 시작된다.” 세월호 참사 228일 만에 방송기자연합회에서 펴낸 보고서 ‘세월호 보도…저널리즘의 침몰’(2014년 11월)은 이렇게 말머리를 연다. 이 보고서는 2014년 4월16일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에서 세월호와 함께 침몰한 한국 언론의 첫번째 반성문 중 하나다. 보고서는 보도 참사를 다섯가지 유형으로 나눴다. 방송사의 ‘전원 구조’ 오보를 부른 관행적 받아쓰기 보도, 참사 당일부터 보험금 운운한 비윤리적 보도, 대통령 방문날 유가족 항의를 음소거한 권력 편향적 보도, 시선을 유병언과 구원파로 돌린 본질 희석식 보도, 이 모든 과정에서 같이 나타난 국가의 책임에 대한 누락·축소 보도 등이다. 세월호 10주기 참사 이후 유가족이 거리로 나오고, 삭발·단식 투쟁을 하고, 세월호 특별법이 통과되고, 9개의 국가기관이 수사·감사·조사 등 진상규명 작업을 벌여온 지난 10년간 언론은 새로운 불신과 무책임의 역사를 축적했다. 지난달 27일 ‘세월호 10주기’ 기자회견에서 김종기 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은 “언론이 가족들을 아프게 했다. 참 기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언론이었다”고 했다. 그간 새로운 반성문이 여럿 쓰였다. 한겨레가 이를 바탕으로 ‘세월호 보도 참사 10년사’를 돌아봤다. 2014년 9월16일치 조선일보에 실린 김대중 칼럼. “‘세월호’라는 마패만 있으면 대한민국의 어느 법도 무시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스크랩마스터 갈무리 ■ 언론은 왜 유가족을 공격했을까 ‘세월호는 왜 침몰했는가’, 그리고 ‘국가는 왜 국민을 구조하지 않았는가’. 두개의 질문을 붙들고 유가족이 결사하면서 세월호 참사는 정치적 의제가 됐고, 사안을 바라보는 언론의 시선도 정파적 경향성에 따라 분열됐다. ‘세월호 사건 보도의 피해자 비난 경향 연구’(홍주현·나은경, 2015)는 종합편성채널(채널에이, 티브이조선) 메인 뉴스의 세월호 보도 속 단어 네트워크를 분석한 논문이다. 이 논문은 보수 성향의 종편 채널이 시위에 나선 세월호 유가족을 ‘순수한 희생자’로부터 분리해 차별적으로 보도했다고 지적한다. ‘유가족=반정부 집단’ 프레임을 형성해 부정적 이미지를 덧씌웠다는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의 요구를 국민 다수로부터 분리해내는 ‘갈라치기 보도’는 보수 매체에서 일관되게 관찰된다. ‘세월호, 국가, 미디어’(이선민·이상길, 2015)는 조선일보와 한겨레의 사설·칼럼을 비교 분석한 논문이다. 이 논문은 여당이 압승을 거둔 2014년 7월 재보궐선거를 기점으로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조선일보의 논조 변화가 두드러진다고 설명한다. 당시 조선일보 사설을 보면 “노란 리본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러도 되는 완장”(9월19일)이 됐고, “국민 다수는 세월호에 대한 인내의 한계점에 도달”(9월26일)했으며, 특별법으로 인해 “국민적 애도는 국민적 반감으로 바뀔 상황”(9월10일)에 처했다. 이는 “국민과 유족을 적대적 관계로 설정하는 논법”으로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유족 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국민, 분별력 없고 시끄러운 소수로서 유족 대 현명하고 침묵하는 다수로서의 국민 등 이항대립을 활성화시킨다”는 것이 논문의 해설이다. 논문의 저자인 이상길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는 “유가족의 기본적인 요구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었는데 이것이 당장 보수 정권에 가져올 정치적 타격을 우려해서 (조선일보가) 더 공격적으로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사회적 참사에서 공동체의 합의를 끌어내야 하는 언론의 기능을 제대로 못 한 사례”라고 평했다. 2016년 1월15일 한겨레티브이(TV)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김어준의 파파이스’ 81회 ‘김병관 그리고 세월호의 마지막 퍼즐’ 방송분. 지금은 영상 설명에 “세월호의 AIS 항적 데이터가 조작되었다는 의혹과 관련해 검찰 세월호참사특별수사단(2021년)은 AIS 항적자료를 입수해 검토했지만 조작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세월호 선체조사위원회(2018년)와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2022년)도 AIS 항적 데이터의 조작이나 편집의 흔적은 없다고 결론냈습니다”라는 공지가 게재되어 있다. 한겨레티브이 유튜브 갈무리 ■ 진상을 흐트러뜨린 의혹 제기 진상규명 과정에서도 언론은 방해꾼에 그치고 말았다는 비판을 받는다. 지난해 5월 전국언론노동조합 민주언론실천위원회(민실위)가 발표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관련 보도 평가와 권고’(김성수, 2023)는 수년간 조사기구와 전문가들이 밝혀낸 진상규명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월호 참사는 밝혀진 것이 없다’는 사회적 통념이 굳건한 현실에 대해 언론의 책임을 따진 보고서다. 특히 선체조사위원회와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 조사 결과 침몰 원인에 대해서는 ‘내인설’로 상당 부분 설명이 가능해졌음에도 언론은 이를 알리기보다 무책임한 의혹 제기에 치중했다는 것이 비판의 뼈대다. 보고서는 ‘잠수함 충돌설’로 대표되는 외력설 의혹, 선박 자동식별장치(AIS) 항적 데이터 조작 의혹, 선내 디브이알(DVR) 바꿔치기 의혹 등을 제기한 한국방송(KBS), 문화방송(MBC), 한겨레를 향해 후속 조치를 요구하고 있다. ‘해당 의혹은 조사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는 공지를 게재하라는 것이다. 한겨레가 지적받은 콘텐츠는 2016년 유튜브 한겨레티브이(TV) 채널에서 내보낸 ‘김어준의 파파이스’ 방송이다. 김어준씨는 여기서 항적 조작설, 앵커 고의 침몰설을 처음으로 제기했고, 이를 바탕으로 영화 ‘그날, 바다’ 등을 제작했다. 항적 조작설은 이후 검찰 수사, 선조위·사참위 조사 결과 기각됐다. 민실위 보고서는 언론이 △선조위·사참위 등 국가조사기구의 발표를 받아쓰기했고 △조사기구 내부 취재원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검증 없이 보도했으며 △사후 오류가 드러나도 정정하거나 후속 보도를 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해당 보고서를 집필한 김성수 뉴스타파 기자는 “그날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진상이 제대로 공유되지 않으니 10년이 지나도 논의가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했다”며 “설령 유가족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라고 해도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안전한 사회’를 위해 싸워온 유가족의 목표를 방해하는 일이 된다”고 말했다. 전국언론노동조합과 4·16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 등 단체가 지난 2월19일 서울 한국방송(KBS)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세월호 10주기 다큐’ 불방 결정을 규탄하고 있다. 출처:한겨레신문 - ■ 10주기, 돌아온 ‘가만있으라’ 실패만 반복한 것은 아니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2014년 9월 한국기자협회 등 5개 단체는 ‘재난보도준칙’을 마련했다. 여기에는 정확한 보도, 윤리적 취재, 무리한 보도 경쟁 자제, 피해자 보호 등 원칙이 담겼다. 서수민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세월호 학습 효과가 분명히 있다. 이태원 참사(2022) 때만 해도 유가족 인터뷰 전에 트라우마 전문가에게 질문지를 검수받은 기자가 있는가 하면, 택시 타고 현장에 달려가는 후배 기자에게 ‘심호흡하고 무리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선배도 있었다”고 말했다. 다만 서 교수는 “이런 개인적 조직적 노력도 정치적 현실 앞에서는 막혀버리는 것이 문제”라고 짚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최근 한국방송에서 벌어진 ‘세월호 10주기 다큐멘터리 불방’ 사건이다. 한국방송은 지난 2월 ‘다큐 인사이트’ 제작진에게 오는 4월18일 방영을 목표로 제작 중이던 다큐멘터리 ‘바람과 함께 살아낼게’(가제)의 4월 방영이 불가능하다고 통보했다. ‘총선(4월10일)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 제작진에게 내려온 불방 사유다. 결국 다큐멘터리 방영은 무산됐다. 김서중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세월호 다큐’를 불편해할 세력의 눈치를 본 정치적 결정이라고 본다. 이 역시 진상규명과 안전 사회를 요구한 유가족의 뜻을 정치적으로 왜곡하는 일인데, 결국 우리 모두의 손해다”라고 말했다. 출처:한겨레신문, 편집:빛고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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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퍼즐은 미완성…‘탐욕’ ‘인재’ 진실의 조각을 인양했다참사 1073일 만인 2017년 3월23일 인양된 뒤 선체 조사를 위해 직립 상태로 전남 목포신항 부두에 거치된 세월호. 한겨레신문- 세월호 참사 10년. 세월호는 뭍으로 올라왔고 세차례 조사를 거쳤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100%의 진실에 가닿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노란 리본을 가슴에 새긴 시민들의 염원은 지난 10년 동안 수많은 진실의 파편을 그러모으는 원동력이 됐다. 한겨레는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2015년 3월~2016년 9월)와 ‘세월호선체조사위원회’(선조위·2017년 3월~2018년 8월),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2018년 12월~2022년 9월)의 조사 기록과 결과를 종합하고 최근 재단법인 ‘진실의힘’이 발간한 ‘세월호, 다시 쓴 그날의 기록’(그날의 기록)을 참고해 지금까지 드러난 진실을 정리했다. 단 하나의 질문, 급선회 궤적은 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에서 가장 관심이 집중된 것은 침몰 원인이다. 침몰 원인이 오랜 기간 미궁에 빠진 것은 세월호 침몰 당시 급선회 궤적과 급격한 기욺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 직후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KRISO)가 진행한 모형선 실험 등에서 치명적인 조타 실수나 조타 장치 오작동 등이 아니고서는 J자 모양의 오른쪽(우현) 급선회 궤적이 나오지 않았다. 이 때문에 침몰 원인 조사 처음부터 끝까지 제기된 단 하나의 질문은 ‘어떤 이유로 급선회 궤적이 이렇게 만들어졌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른바 ‘잠수함 충돌설’을 비롯한 다양한 가설이 나왔던 것 역시 급선회 궤적을 설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특조위, 선조위, 사참위 세차례의 조사에서도 침몰 원인에 대한 통일된 결론이 나오지 못했다.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한 가설은 현재 3가지다. 암초 등에 부딪혀 가라앉았다는 ‘좌초설’, 잠수함 충돌을 비롯한 외력으로 침몰했다는 ‘외력설’, 복원력(배가 평형을 유지하려는 힘) 부족과 기관 고장으로 사고가 일어났다는 ‘내인설’이다. 2022년 9월 활동을 마무리한 사참위는 종합보고서에서 “(기관 고장 등이) 세월호의 급격한 우선회와 횡경사(기울임)를 유발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판단했고 “(외인설은)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나 동시에 다른 가능성을 배제할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밝혔다.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대한조선학회는 2022년 6월 사참위에 공식 의견서를 제출하면서 “좌초설과 외력설 가능성은 기술적으로 현저히 낮으며 내인설의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본다”고 결론 내렸다. 사참위가 침몰 원인 규명을 위해 용역을 맡긴 네덜란드 해양연구소 ‘마린’ 역시 ‘자유항주 모형시험 용역결과보고서’(2022년 5월)에서 “모형시험 결과 외력 없이도 과도한 횡경사가 내재적 요인으로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며 “낮은 지엠(GM·선박복원력), 방향타 사용, 화물 이동이 세월호의 급격한 선회와 극심한 기울기의 주요 요인이라는 것이 마린의 의견이다”라고 밝혔다. 뭍으로 올라온 세월호가 품은 진실 내인설의 전제는 복원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기관(조타 장치) 고장이 침몰을 촉발했다는 것이다. 배는 방향을 전환할 때 보통 5도 이하로 조타기를 조작한다. 그럼 조타기에 연결된 러더(방향타)가 해당 각도만큼 회전해 배의 진로를 조정한다. 문제는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세월호와 같은 궤적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월호와 같은 급선회 궤적이 나오려면 복원력이 크게 낮은 상태에서 큰 각도로 조타가 이뤄져야 한다. 기관 고장이 발생하면 이런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세월호 러더의 최대 각도는 35도이지만, 기관 고장 때에는 37도까지 돌아갈 수 있다. 법원에서도 기관 고장의 가능성을 의심했다. 광주고법은 2015년 4월28일 세월호 항해사와 조타수의 업무상과실 선박 매몰 사건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하며 “세월호를 건조할 당시 우현 최대 타각 35도로 한 선회 시험이 사고 당시 세월호 항적과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 ‘솔레노이드밸브’ 고착 현상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세월호를 해저에서 인양해 관련 부품을 정밀히 조사한다면 사고 원인이나 기계 고장 여부 등이 밝혀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솔레노이드밸브(솔레노이드)는 러더를 움직이는 기관이다. 러더는 유압(기름의 압력)으로 움직이는데, 솔레노이드가 고장 나 멈춰야 할 기름이 계속 흐르게 되면 조타기를 한쪽으로 조금만 돌려도 러더가 한쪽 끝까지 회전한다. 참사 1073일 만인 2017년 3월23일, 세월호가 인양되면서 법원이 제기한 의문을 풀 기회가 생겼다. 선조위의 조사 결과 실제 솔레노이드 안에 있는 철심이 찌꺼기 등에 의해 굳게 들러붙은 것(고착)이 확인된 것이다. 이 경우 약간의 방향 전환으로도 러더는 37도까지 돌아갈 수 있다. 세월호 모형을 만들어 대형 수조에서 실험한 마린도 복원력이 낮은 상태에서 러더가 많이 돌아갔다면 세월호와 유사한 궤적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기관 고장의 남은 쟁점 내인설에도 약점이 존재한다. 세월호가 쓰러진 직후 구조에 나선 선박 등이 찍은 영상을 보면 러더가 ‘우현 37도’가 아닌 ‘좌현 8도’로 나온다. 선조위 내에서는 이런 이유로 솔레노이드 고착이 사고 원인이 될 수 없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 때문에 선조위의 종합보고서는 ‘내인설’과 ‘열린안’(외력 가능성 포함) 두개로 나뉘어 작성됐다. 하지만 내인설에서도 러더 ‘좌현 8도’가 존재할 수 없는 현상은 아니다. 선조위 종합보고서(내인설)를 보면 세월호에는 2개의 타기 펌프가 있고 타기 펌프 안에는 2개의 솔레노이드가 있다. 고착이 발생한 것은 2번 타기 펌프의 비(b) 솔레노이드다. 당시 조타수는 배가 오른쪽으로 급선회하자 왼쪽으로 조타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고 했다. 이때 조타실 왼쪽 출입문에 있던 3등 항해사 박한결이 2번 타기 펌프 정지 버튼을 눌러 솔레노이드 고착의 영향이 사라졌고, 그제야 정상 작동하는 1번 타기 펌프에 왼쪽으로 조타한 신호가 전달되어 러더가 왼쪽으로 이동했다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실제 박한결은 참사 당시 조타기에 이상이 생길 때 울리는 타기 알람이 울려 이를 끄려고 하다가 잘못해서 타기 펌프 정지 버튼을 먼저 눌렀다고 검찰에서 진술한 바 있다. 박한결이 1, 2번 타기 펌프 중 어떤 것을 껐는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지만 그의 진술로 세월호가 넘어진 직후 러더가 좌현 8도로 돌아간 이유는 설명이 가능하다. 전남 목포신항에 인양된 세월호.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방향타(러더)가 오른쪽(우현)으로 23도 돌아가 있다. 연합뉴스 참사의 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많은 이들은 참사 원인에 대한 의문을 풀어줄 단 하나의 명쾌한 답변을 기다렸다. 하지만 304명의 생명을 앗아간 참사의 원인은 단 하나가 아니었다. 침몰을 촉발한 것이 무엇이냐에 대한 의견은 갈리지만, 증개축으로 선박의 복원력이 낮아졌고 화물이 제대로 고정(고박)되지 않았던 탓에 배가 더 빨리 기울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다. 청해진해운은 세월호(1994년 일본에서 건조)를 2012년 사들이며 선미에 전시실을 짓고, 객실을 증설했다. 세월호의 무게는 일본에서보다 239톤 늘었고, 이런 이유로 배의 복원력은 크게 낮아졌다. 세월호가 허가받은 화물 적재량은 987톤이었다. 하지만 사참위 조사 결과 실제로는 차량 185대(584톤) 등 총 2214톤이 적재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이런 화물은 고박이 제대로 되지 않아 한쪽으로 쏠리며 침몰을 가속했다. 시시티브이와 블랙박스 등을 보면 차량 절반에는 고박 장치가 체결되어 있지 않았다. 만재배수량이 9907톤에 달하는 세월호가 쓰러진 지 101분 만에 침몰한 것 역시 우연이 아니다. 통상 배는 격실 구조로 각각의 공간이 ‘수밀’(밀봉)돼 있다. 이 때문에 쓰러져도 침수되지 않은 격실에 남은 공기의 부력으로 오래 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선조위 조사 결과 세월호 가장 아래에 위치한 이(E) 갑판의 수밀문 2개와 맨홀 5개가 모두 열려 있었다. 수밀문과 맨홀은 닫아둔 상태로 운항해야 한다. 선조위와 마린의 시뮬레이션 결과, 수밀문과 맨홀이 모두 닫혀 있었다면 배가 65도로 기운 상태에서 더 오랜 시간 떠 있을 수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구조 시간을 충분히 벌 수 있었단 이야기다. 아직 우리는 진실을 100%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세차례의 조사와 세월호 인양으로 알아낸 사실은 결코 적지 않다. 선체 개조 때 수익이 아닌 안전을 고려했다면, 화물 고박만 제대로 됐다면, 수밀문과 맨홀을 제대로 닫기만 했다면, 유사시 선원들의 대응 훈련이 있었다면 304명의 목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지난 10년, 세월호는 참사를 막을 그토록 많은 기회를 왜 놓치고 말았냐고 거듭 되묻고 있다. 출처:한겨레신문. 편집:빛고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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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섭 “‘채상병 사건’ 혐의 특정 말라” 지시 정황 문건 확인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국방부 조사본부에 ‘채아무개 상병 순직 사건’ 재검토를 맡기면서 결론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내린 정황이 문서로 확인됐다. 당시 국방부는 해병대수사단이 이미 경찰로 이첩한 사건을 되가져와 조사본부에 넘기면서 ‘해병대수사단의 결론에 미진한 점이 있으니 객관적 재검토를 맡긴 것’이라는 취지로 설명했다. 그러나 애초부터 결론이 정해진 재검토였다는 점이 드러난 셈이다. 6일 한겨레가 입수한 국방부 법무관리관실이 지난해 8월 9일 조사본부에 내려보낸 ‘채아무개 상명 사망사고 해병대 조사결과에 대한 검토보고’ 문서를 보면, 국방부는 ‘임성근 해병대1사단장 등 지휘부의 혐의를 특정하지 말라’는 처리 방향을 조사본부에 내려보냈다. 문서는 이 전 장관의 지시로 지난해 8월9일 국방부 조사본부에 전달됐다. 조사본부는 이틀 뒤인 11일 수사기록을 입수해 검토를 시작했다. 기록 입수도 하기 전에 사실상 결론이 전달된 셈이다. 국방부는 문서에서 “(사건) 관련자 모두를 ‘업무상과실치사'로 이첩하는 경우 범죄를 인지하지 못했음에도 관련된 과오를 모두 경찰에 이첩해 오히려 진실규명에 대한 책임을 경찰에 전가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고, 경찰수사의 범위를 불필요하게 확장하는 등 수사에 혼선을 초래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또 국방부는 문서에서 “(관련자의 혐의를 특정하면) 오히려 사건에 대한 실체적 진실규명과 재발방지가 되기보다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사건이 될 우려가 있다”며 “인과관계 등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에는 (혐의 적시 없이) 작전과정에서의 과오에 대해 사실관계를 정리해 이첩사건과 함께 경찰에 송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물에 들어가 수색하라’고 직접 지시한 이들에게만 혐의를 적용하고 임성근 당시 해병대1사단장 등 지휘부에게는 혐의를 특정하지 말라는 취지다. 국방부는 해당 문서가 조사본부에 전달된 배경에 대해 “조사본부에게 사건 전반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해왔다. 하지만 5장짜리 문서를 보면 ‘사건 전반을 이해’시키려는 목적보다 ‘혐의 특정을 최대한 자제’토록 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읽힌다. 문서 전달에는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은 지난해 군검찰 조사에서 “해당 검토 내용을 조사본부와 공유하라는 (이종섭 당시 국방부 장관의) 지시에 따라 이를 (조사본부와) 공유했다”고 진술한 바 있다. 가이드라인은 같은 달 21일 조사본부의 재검토 최종결과에 그대로 반영됐다. 당시 조사본부는 임성근 당시 해병대 1사단장을 포함해 사건 관련자 8명에 대해 업무상과실치사상 혐의를 적용했던 해병대수사단 조사 결과와 달리 임 전 사단장 등 6명에 대해선 범죄 혐의를 적지 않고 사실관계만 정리해 경찰에 넘기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국방부의 가이드라인대로 조사본부가 임 전 사단장 등의 혐의를 적시하지 않는 것으로 재검토 결론을 내린 셈이다. 출처:한겨레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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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봉투 논란’ 정우택·‘의원직 상실’ 김선교 공천···국민의힘,국민의힘은 25일 충북 청주상당 정우택 의원, 경기 여주·양평 김선교 전 의원 공천 등 19곳의 경선 결과 등 총 20곳의 공천을 확정했다. 정 의원 외에도 지역구 현역 의원으로 경선에 참여했던 박덕흠·엄태영·이종배·장동혁 의원이 모두 경선에서 승리했다. 현역 불패를 재확인하면서 국민의힘 공천에 혁신, 물갈이가 없다는 비판이 더욱 심화할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실 출신들이 경선에서 대부분 탈락하면서 친윤석열계 확장성의 한계를 드러냈다. 국민의힘 공천관리위원회는 이날 서울 여의도 당사 브리핑에서 지난 23~24일 서울 6곳, 인천 2곳, 경기 3곳, 충북 5곳, 충남 2곳, 제주 1곳 등 19곳에서 진행한 1차 경선 결과를 발표했다. 해당 지역은 모두 당에서 1권역(서울 일부·인천·경기·호남·충청·제주)으로 분류한 곳으로 당원 20%, 일반국민 80% 여론조사를 반영해 결과를 결정한다. 청년·정치신인에는 가점, 징계·탈당 인사 등에는 감점을 적용했다. 돈봉투 의혹을 받았던 정우택 의원은 충북 청주상당에서 윤갑근 전 대구고검장과 맞붙은 결과 공천이 확정됐다. 정 의원은 한 충북 지역 언론사 보도로 지난 14일 2022년 충북 청주 한 카페 사장으로부터 돈 봉투를 받는 장면이 담긴 CC(폐쇄회로)TV 영상이 공개됐다. 정 의원은 “돈봉투는 바로 돌려줬고, 공식 후원금으로 회계처리했다”며 정치공작이란 입장을 밝혔다. 경기 여주·양평에서는 지난해 의원직을 상실했던 김선교 전 의원이 비례대표 이태규 의원을 꺾고 공천이 확정됐다. 김 전 의원은 불법 후원금을 모집한 혐의로 기소됐다. 지난해 5월 대법원 판결에서 본인은 무죄를 확정 받았지만 회계책임자가 벌금 1000만원형이 확정되면서 의원직이 상실됐다. 공직선거법에 따르면 배우자나 직계 존비속 또는 선거사무장·회계책임자 등이 징역형이나 300만원 이상의 벌금형을 선고받으면 의원직을 상실한다. 이번 공천 결과 국민의힘의 현역 불패가 재확인됐다. 지역구 현역 의원들은 대통령실 출신 인사들도 모두 탈락시키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충북 제천·단양 엄태영 의원과 최지우 전 대통령실 행정관, 충북 충주 이종배 의원과 이동석 전 대통령실 행정관의 경선에서 엄태영·이종배 의원이 각각 승리했다. 서울 동대문갑에 출마한 여명 전 대통령실 행정관은 비윤석열계로 분류되는 김영우 전 의원과의 경선에서 탈락했다. 대통령실 출신 중에서는 유일하게 인천 남동을에 출마한 신재경 전 대통령실 선임행정관이 고주룡 전 인천시 대변인과 경선해 공천을 확정지었다. 이외에도 지도부인 장동혁 사무총장이 경선 결과 공천 확정됐다. 검사 출신인 경대수 전 의원은 충북 증평·진천·음성에서 이필용 전 음성군수를 제치고 공천장을 거머쥐었다. 현 지도부 소속 영입인재와 전·현직 의원이 3자 경선을 벌인 서울 양천갑에서는 정미경 전 의원이 탈락하고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측 인사인 구자룡 비상대책위원과 비례대표 조수진 의원이 결선 여론조사를 다시 치른다. 충남 홍성·예산에서는 경선 없이 강승규 전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의 공천이 확정됐다. 홍문표 의원은 경선 경쟁자였으나 지난 22일 경선 포기를 선언했다. 홍 의원은 지난 23일 CBS라디오에서 “몇 가지의 원칙이 좀 안 맞는 것 같아서 지도부에 공관위에 건의를 했다 ‘강모 후보의 문제, 이런 것이 시정되지 않으면 불공정이다’라고 그랬는데 답을 기다려도 답이 없었다”며 “너무 불이익을 많이 받아서 여기는 내가 경선을 참여할 수 없다 해서 포기한 것”이라고 했다. 정영환 공관위원장은 이날 브리핑 직후 기자들과 만나 현역 교체율이 낮다는 지적에 대해 “현역들이 지역 관리를 굉장히 잘했거나 경쟁 후보의 지명도가 아직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게 됐다고 평가한다”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정하다”고 말했다. 정 위원장은 의원직을 상실했던 김선교 전 의원에 대해 “감산이 없고 여론조사가 굉장히 잘 나와서 이렇게(공천)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장 총장은 “본인이 아니라 회계책임자가 공직선거법 위반됐던 것이 참작은 됐지만 모든 점수를 합산해서 경선으로 갔다”며 “경선 이후에는 당원 20%, 일반국민 80%, 총 100% 여론조사에 의해 최종 후보자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출처:경향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