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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현(朴寬賢) - 빛고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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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7.17(목)

人物기억해야 할 인물

박관현(朴寬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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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현(朴寬賢, 1953년 6월 19일 ~ 1982년 10월 12일).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

 

1953년 6월 19일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의 빈농 가정에서 아버지 박정한과 어머니 이금녀 슬하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불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로 유학하여 광주동중학교와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4년부터 1977년까지 육군 병장으로 복무하였으며, 만기전역 한 후 1978년 3월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입학한 박관현은 1978년 12월부터 2개월 동안 광주시 서구 광천동 지역의 노동실태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들불야학에서는 윤상원과 함께 노동자와 학생들을 가르쳤다.

 


제가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박관현이올시다. 이 우레와 같은 박수와 여러분의 함성이 전 국토와 민족에게 다 들릴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큰 목소리로 외쳐봅시다. 우리가 민족민주화 횃불대행진을 하는 것은 이 나라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고, 이 횃불과 같은 열기를 우리 가슴속에 간직하면서 우리 민족의 함성을 수습하여 남북통일을 이룩하자는 뜻이며, 꺼지지 않는 횃불처럼 우리 민족의 열정을 온 누리에 밝히자는 뜻입니다. 이런 뜻에서 우리 광주시민, 아니, 전남도민, 아니, 우리 민족 모두가 이 횃불을 온 누리에 밝히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 1980년 5월 16일, 전남도청 앞 민족민주화성회 연설

 

10.26 사건 이후 서울의 봄이 오면서 전국의 각 대학들은 다시금 활발하게 민주운동과 학생운동에 나섰다. 전남대학교 또한 그 변화의 물길 가운데 서 있었다. 박관현은 1980년 4월의 총학생회 선거에서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총학생회장으로서 그는 한 달 후에 있던 민족민주화성회를 주도했다. 거기서 박관현은 일장 연설을 한 후 "휴교령이 발동되면 정오에 도청 앞 광장에 모이자"고 말했다.

하지만 곧 신군부가 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면서 그를 포함한 학생지도부는 검거 대상으로 들어갔다. 박관현은 동지들과 함께 급히 도피했다. 그는 먼저 전남 여수로 갔다가 서울의 동생 집을 통해 인근 친척집에서 은신하게 된다. 제수의 소개로 한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기도 했다.

신군부에게 잡히지 않고 박관현은 1년 정도 버텼다. 하지만 그는 5.18 때 죽어간 친구들을 떠올리며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숨어서 사는 놈'이라는 독백도 자주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현상금을 노리는 누군가의 밀고로 인해 1982년 공장으로 출근하던 길에 체포되었다.

 
박관현은 재판에서 내란중요임무종사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광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1982년 7월부터 "5.18 진상규명, 재소자 처우 개선"을 외치며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50일 간 3차에 걸친 단식투쟁이 이어졌고, 끝내 그는 급성심근경색과 급성폐부종 증세를 보이며 1982년 10월 12일에 29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의 유언은 이러했다.
3천만 우리 민족을 위하는 길이라면 내 목숨을 바치겠다. 재소자 2천 명의 처우가 개선되도록 하였으니 내 할 일은 다 했소. 어머니, 나는 죽어도 좋아요.
 
그가 사망한 후 10월 13일부터 11월 초까지 전남대에서는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항의시위가 크게 열렸으며, 서울의 여러 대학들도 이에 동참하여 박관현의 사인을 규명하라고 외쳤다. 광주교도소의 양심수 40여명도 단식농성을 벌이며 신군부의 폭력성을 규탄하기도 했다.
 
참조:나무위키.  편집:빛고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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