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현(朴寬賢, 1953년 6월 19일 ~ 1982년 10월 12일). 대한민국의 학생운동가.
1953년 6월 19일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쌍운리의 빈농 가정에서 아버지 박정한과 어머니 이금녀 슬하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향에서 불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로 유학하여 광주동중학교와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74년부터 1977년까지 육군 병장으로 복무하였으며, 만기전역 한 후 1978년 3월 전남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입학한 박관현은 1978년 12월부터 2개월 동안 광주시 서구 광천동 지역의 노동실태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들불야학에서는 윤상원과 함께 노동자와 학생들을 가르쳤다.
10.26 사건 이후 서울의 봄이 오면서 전국의 각 대학들은 다시금 활발하게 민주운동과 학생운동에 나섰다. 전남대학교 또한 그 변화의 물길 가운데 서 있었다. 박관현은 1980년 4월의 총학생회 선거에서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총학생회장으로서 그는 한 달 후에 있던 민족민주화성회를 주도했다. 거기서 박관현은 일장 연설을 한 후 "휴교령이 발동되면 정오에 도청 앞 광장에 모이자"고 말했다.
하지만 곧 신군부가 계엄령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면서 그를 포함한 학생지도부는 검거 대상으로 들어갔다. 박관현은 동지들과 함께 급히 도피했다. 그는 먼저 전남 여수로 갔다가 서울의 동생 집을 통해 인근 친척집에서 은신하게 된다. 제수의 소개로 한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기도 했다.
신군부에게 잡히지 않고 박관현은 1년 정도 버텼다. 하지만 그는 5.18 때 죽어간 친구들을 떠올리며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나는 숨어서 사는 놈'이라는 독백도 자주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현상금을 노리는 누군가의 밀고로 인해 1982년 공장으로 출근하던 길에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