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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金開南) - 빛고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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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30(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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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金開南)

조선 말기의 인물로서 동학농민운동에서 전봉준과 더불어 대표적인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본관은 도강(道康), 자는 기선(箕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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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9월 15일 전라도 태인현 산외이변면 정량동(現 전라북도 정읍시 산외면 정량리 원정마을 988-1번지)에서 아버지 김대흠(金大欽)과 어머니 익산 이씨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농 가정으로 선비 대우를 받던 집안에서 태어났으므로 김개남은 어릴 적부터 학문도 어느 정도 배우며 자랐다. 어린 나이에 비하여 친화력과 담력도 큰 편이라서 개구쟁이로도 유명했다고 한다. 성인이 된 김개남은 키가 작지만 총명하였다고 한다.

20대 후반이 되어서 김개남은 전봉준을 처음으로 만났고 30대가 되어서는 동학을 접한다. 이 시기 김개남은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다양한 경험을 했고 동학의 2대 교주였던 최시형과도 인연을 맺었다. 그리하여 자신도 동학에 입교했으며 동학의 포교 활동이나 교조 신원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김개남은 지도력이 뛰어나서 전라도 지역의 다른 접주들과 함께 많은 군중을 동원하는데 앞장섰고 전라도 지역의 동학 집단에서 전봉준, 손화중 등의 인물처럼 영향력있는 지도자가 된다.

전봉준이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자 김개남은 13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백산에서 동학 농민군과 합류했으며 봉기 당시 손화중과 함께 부지도자 격의 위치에서 동학 농민군을 이끌었다. 이후 전주성을 점령하고 전주 화약이 체결되면서 농민군은 일시 해산되었지만 집강소에서 활동을 계속하며 남원을 중심으로 임실, 장수, 무주 등에서 농민 자치 행정을 펼쳤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 중에서도 강경파였으며 반(反)봉건주의 성향이 강했기에 다른 곳의 집강소에 비해 급진적인 모습을 넘어 과격했었다. 동학 농민군을 조직해 양반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여 2차 봉기 때 흥선대원군의 지시에도 양반들의 민보군은 청나라군이나 동학 농민군보다는 관군이나 일본군에게 협력하게 된다. 실제로 민보군은 경복궁을 습격한 일본군을 경계하는 사림이 다수였지만 김개남의 과격함+명분론에 입각한 반청주의+깍뜻한 일본군의 대접으로 관군이나 일본군보다 적극적으로 토벌에 나서게 된다.

전봉준이 2차 봉기를 일으켰을 때 김개남은 여기에 합류하지 않았다. 그래서 공주목 우금치 전투 때도 김개남 부대는 참전하지 않았고 10월 경에야 움직였다. 김개남은 1만여 명의 동학 농민군을 인솔하여 여러 수령들을 가렴주구의 혐의로 처형하고 북진하여 청주목 방면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청주성 전투에서 김개남의 부대는 관군과 싸우던 도중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패퇴했고, 이후 연산으로 후퇴하여 전봉준의 부대와 합류하지만 전봉준 쪽도 우금치의 패배 이후 계속 쫓기는 처지였기에 상황이 좋지 못했다. 결국 두 사람의 농민군은 태인 전투를 마지막으로 와해된다.

김개남은 태인현 산내일변면 사승리(現 정읍시 산내면 장금리 사승마을)에 있던 매부 서영기(徐永基)의 집으로 피신했지만 임병찬의 고발로 인해 강화 진무영 소속 병사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결국 붙잡힌 김개남은 전주부로 압송된 뒤 이튿날인 1894년 12월 3일 전라감사 이도재에 의해 전주부 부북면 검암리 숲정이(現 전주시 덕진구 진북동 숲정이성지)에서 즉결 처형당해 효수되었고, 머리는 한성부로 보내져 3일간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조리돌려졌다. 
 
전봉준과는 같은 동학 농민군 지도자로서의 친분과 단결력도 있었지만 충돌하는 것도 있었는데 급진파였던 김개남은 전봉준이 근왕주의적 태도를 보이는 것을 껄끄럽게 여겼다. 전봉준이 "탐관오리를 족치자" 는 입장이었다면 김개남은 "봉건주의 전부를 족치자" 는 입장이었다. 물론 이들이 반봉건과 반외세를 외쳤다는 점에서 동지 입장이었지만 그들의 현실 대처 방법과 속도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죽기 전에 남긴 말에 따르면 흥선대원군과 접촉이 있었다고 한다. 2차 봉기와 관련되는 것인데 흥선대원군이 밀사를 보내 재봉기를 부추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전봉준은 이를 부정했다.
 
김개남이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 칭하고 조선을 타도하려 했다는 의혹도 있다.
 
김개남의 후손들은 힘들게 살았다고 하는데 김개남이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불태워야 했고 역적의 핏줄이라며 다른 이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동학농민운동의 재평가와 함께 김개남 또한 재평가되면서 후손들도 이제는 당당하게 살 수 있다고 한다.[15] 동학농민운동이 실패한지 거의 60년 넘게 동학군은 역적으로 취급받다가 박정희 정부가 출범하고 나서야 비로소 '위대한 민중 혁명' 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지방에서는 동학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많은데 동학농민운동을 취재하러 갔던 언론인들이나 지식인들이 지방에서 동학군을 토벌했던 관군의 후손들과 만나 인터뷰를 하면 "동학군은 역적이다!" 라는 반응을 접하고 놀라는 일도 많다고 한다[16].
 
김개남의 잘려진 목을 두고 전봉준의 목이라고 엉터리로 표기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동학농민운동 기념관에서 김개남의 사진을 가지고 전봉준의 목이라고 엉터리 설명을 달았다가 비난을 받고 고치던 적도 있다.
 
김개남의 고택터는 그동안 밭으로 사용되어 왔는데 2017년 발굴 조사를 통해 유물이 발굴되면서 현재 정읍시가 복원 사업을 추진 중이다.
 
자료:위키백과. 편집:빛고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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