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

존 데일리(John Vincent Daly, 요한)신부 - 빛고을신문

  • 흐림속초22.6흐림북춘천23.3흐림철원24.5흐림동두천23.7흐림파주24.2흐림대관령18.7흐림춘천22.8구름많음백령도24.4비북강릉22.3흐림강릉23.5흐림동해22.4비서울24.1흐림인천24.0흐림원주23.0비울릉도23.7비수원24.0흐림영월21.2흐림충주21.8흐림서산25.8흐림울진22.1천둥번개청주22.9천둥번개대전22.2흐림추풍령21.2비안동21.6흐림상주21.7비포항22.3흐림군산24.3비대구22.1비전주23.0흐림울산23.2비창원23.8비광주22.7흐림부산27.7흐림통영27.5흐림목포27.2구름많음여수28.0비흑산도24.1흐림완도29.0흐림고창24.0흐림순천22.0비홍성24.2흐림서청주22.3구름많음제주32.0구름많음고산27.7구름많음성산27.1흐림서귀포29.2흐림진주22.5흐림강화24.4흐림양평22.3흐림이천22.5흐림인제21.5흐림홍천22.1흐림태백19.5흐림정선군20.7흐림제천21.1흐림보은21.5흐림천안22.4흐림보령24.7흐림부여23.4흐림금산22.2흐림세종22.2흐림부안24.7흐림임실21.6흐림정읍24.0흐림남원22.9흐림장수21.4흐림고창군24.0흐림영광군23.6흐림김해시24.7흐림순창군22.4흐림북창원24.9흐림양산시27.6흐림보성군27.9흐림강진군27.7흐림장흥26.8흐림해남28.7구름많음고흥28.1흐림의령군21.5흐림함양군22.6흐림광양시24.4흐림진도군27.8흐림봉화20.6흐림영주21.0흐림문경21.3흐림청송군21.5흐림영덕22.0흐림의성22.0흐림구미22.8흐림영천21.6흐림경주시22.6흐림거창22.1흐림합천22.3흐림밀양22.2흐림산청21.8흐림거제27.5흐림남해27.6흐림북부산27.4
  • 2025.07.17(목)

人物기억해야 할 인물

존 데일리(John Vincent Daly, 요한)신부

201112296951g_2011122987571.jpg

정일우(鄭日祐) 또는 존 데일리(John Vincent Daly, 요한, 1935년 11월 21일 ~ 2014년 6월 2일)는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 태어나 40년 가까이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예수회 신부이자 빈민운동가이다.

 

미국 일리노이주 출신인 정일우는 1953년 8월 8일 예수회에 입회하여 1960년 9월 예수회 신학생 신분으로 처음 한국에 왔고, 1963년 실습이 끝난 후 미국으로 돌아가 세인트루이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뒤 1966년 사제서품을 받고, 고등학교 은사인 고(故) 바실 프라이스 신부(2004년 선종)의 영향으로 한국을 떠난 지 4년 뒤인 1967년에 다시 한국으로 와서 서강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정일우 신부의 은사 프라이스 신부는 서강대학교 설립의 주역으로, 1966년 국내 최초로 노동문제연구소를 열고, 이후 34년 동안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했다. 노동자들에게 노동법과 노조활동, 단체교섭 방법 등을 가르친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선구자이다.

 

서강대학교에서 신학을 가르치고 예수회 수련장으로 일하고 있던 정일우 신부는 그 자신에 대해 ‘복음을 입으로만 살고 있다’는 강한 의구심이 생겼다. 이에 정일우 신부는 1973년 예수회 수련장에서 물러나고 찾아 들어간 청계천 판자촌에서 평생 동지였던 ‘배달학당’ 야학 교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고 제정구 선생(1944~1999, 바오로)과 처음 만났다.

이후 제정구 선생과 정일우 신부는 1975년 11월 양평동 판자촌 생활을 시작으로 철거민 집단이주 마을로 복음자리(1977년), 한독주택(1979년), 목화마을(1985년)을 건립하였다.

 

양평동 판자촌 일대가 재개발되면서 주거민을 이끌고 집단 이주해 조성한 공동체가 '복음자리 마을'이고, 이 복음자리 공동체에서 만든 제품이 복음자리 딸기잼이다.

1980년대는 목동, 상계동 등 강제철거에 맞서 도시빈민운동에 함께 하였다. 1985년 천주교 도시빈민회, 1987년 천주교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를 교구장 자문기구로 설립하는데 기여하였으며, 1988년 민중주거쟁취 아시아연합 설립에도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정일우 신부는 1986년에 아시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막사이사이상을 고 제정구 전의원과 공동으로 수상하였다.

 

정일우 신부는 1991년 서울 마포구 공덕동 빈민촌에 ‘한몸공동체’를 세웠다. 청소년들의 쉼터, 외국인 노동자들 쉼터, 농촌의 누룩공동체 등 예수회 사회사도직은 도시빈민, 이주노동자, 약물청소년, 아이들 공부방, 농촌 분야로 확산되었다.

 

1997년 대한민국으로 귀화한 정일우 신부는 도시빈민 운동이 교회와 사회에서 자리잡아 가면서 산업화 과정에서 정부의 값싼 노동력 제공과 저가 미곡정책으로 희생을 강요 당한 농촌으로 눈을 돌려 농민들을 위한 신앙과 생활 공동체인 '예수회 누룩공동체'를 충북 괴산군 삼송리에 세웠다.

정 신부는 누룩공동체의 삼송리 농부생활 8년을 마감하고, 2002년 4월 예수회 사회사도직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서울 무악동 '한몸공동체'로 다시 왔다. 그러면서 2006년까지 예수회 제3수련장을 맡았다.

 

정일우 신부는 2004년 70살 생일을 앞두고 63일간 지속한 단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서울 평창동 성이냐시오집에서 요양해오다, 2014년 6월 2일 선종하였다.

 

자료참조:위키백과. 편집:빛고을신문

검색결과는 총 25건 입니다.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