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태석(李泰錫, 1962년 10월 17일(음력 9월 19일) ~ 2010년 1월 14일)
대한민국의 살레시오회 소속 선교사 사제 겸 의사
대한민국의 의사이자 가톨릭 교회 살레시오회의 수도자 겸 신부.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수단(現 남수단) 톤즈(Tonj)에 선교사제로 파견되어 구호, 의료, 교육, 사목활동에 힘썼으며, 현지인들을 진심으로 감화시킨 헌신적인 봉사 덕에 가톨릭은 물론이고 타 종교인들과 무종교인들에게도 큰 존경을 받는다. 수단 현지에서 부르는 애칭은 세례명 요한의 영어식 표기인 존(John)과 성씨 리(Lee)의 합성어인 '쫄리'이다.
10남매 중 아홉 번째로 태어난 이태석 신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홀어머니가 삯바느질을 하여 생계를 유지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였다. 특히 수학에서 성적이 우수했으며 성당에서 풍금을 독학으로 익히고 직접 작사, 작곡도 하는 등 음악적 능력도 뛰어났다.
천주교 부산교구 송도본당에서 앨로이시어스 슈워츠(Aloysius Philip Schwartz, 또는 소 알로이시오) 몬시뇰 신부에게서 유아세례를 받았다. 미국인 슈워츠 신부는 훗날의 이태석 신부가 남수단에서 살아온 인생과 비슷한 인생을 먼저 살아가고 있던 인물로, 이태석 신부의 스승이다. 그는 전후 최빈국으로 떨어진 한국에 들어와 오랫동안 부산에서 봉사하고 학교법인 소년의집학원을 세워 고아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으며, 영화 오 마이 파파가 슈워츠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다.
이 시기에 성당에서 보여준 성 다미안 드 베스테르 신부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보고 소년 이태석은 그 신부와 같은 삶을 살겠다고 결심한다. 중학교 3학년의 이태석은 자신이 작사 작곡한 아래의 노래를 통해 자신이 바라는 삶을 그린다.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왜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
세상엔 죄인들과 닫힌 감옥이 있어야만 하고
인간은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만 하느냐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 말씀하셨지
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난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 평화 위해
난 사랑하리라 내 모든 것 바쳐
「묵상」, 갓등중창단 1집 『내 발을 씻기신 예수』, 1993"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에 81학번으로 입학, 1987년에 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하여 의사 면허를 취득한다. 그후 육군 12사단 및 군수사령부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신부의 꿈을 품었다. 전역 후인 1991년, 이탈리아인 성 요한 보스코 신부가 설립한 가톨릭 교육 수도회인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리고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2001년 6월 24일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주례로 서울대교구 구로3동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오늘날 한국천주교의 큰 자랑이자 존경을 받는 두 사제의 놀랄 만한 인연이었던 셈이다.
보통 사람보다는 늦은 시작이었지만 그의 신앙과 덕행은 남달랐다. 사제 수품 직후 아프리카 케냐로 건너갔다가 얼마 안 되어 더 위험하고 어려운 지역인, 20년 동안 내전이 계속되었던 수단(현 남수단)으로 건너가 의료활동을 시작하였다.
먼저 열악한 수단의 환경 속에서도 병원을 손수 만들었다. 초창기의 병원은 현지인들이 사용하던 움막을 개조한 작은 사이즈의 시설이었다. 자서전에 따르면 환경이 열악해 진료 도중 환자의 상처에 천장에서 떨어진 거미나 벌레가 붙은 적도 있다고 한다. 2004년 새 병원 건물 공사를 시작해 이듬 해인 2005년부터 진료실, 수술실, 입원실 등을 갖춘 현대식 병원 건물을 완공했다.
나병 혹은 문둥병이라 불리는 한센병 환자들과 결핵 환자들을 보살피며 지속적인 예방접종 사업을 벌였다. 특히 발가락이 뭉그러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그들의 발에 맞춰서 한 명 한 명 본을 뜨고 맞춤 제작한 신발을 선물하기도 했다. 또한 일주일에 한 번씩 오지 마을을 돌아다니며 이동 진료를 하면서 8년을 지냈다.
내전으로 인해 가장 피해를 받을 미래 세대들을 걱정하며, 손수 학교와 기숙사를 짓고 수학을 가르치기에 이른다. 원래 톤즈에는 초등학교 밖에 없어서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려면 120km 떨어진 다른 지역까지 유학을 가야했다. 하지만 가난한 톤즈 사람들 형편 탓에 아이들을 멀리 유학시킬 돈이 없어 대부분의 주민들은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학업을 포기하고 생업에 종사해야했다. 초기에는 땅바닥에 칠판을 놓고 아이들을 가르쳤지만, 2006년 초중고 12년 과정을 갖춘 새 학교 건물을 폭격을 맞아 부서진 기존 학교 건물 위에 덧대어 새로 건축했다. 교복은 한국의 중고등학교 사재교복을 가져와서 입혔다고 한다.
거기다 아이들을 모아 악단을 만들고 지휘를 맡기까지 했다. 이때 브라스밴드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사람이 당연히 없었기에 스스로 교본을 보고 배워서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악보도 직접 만들어서 나눠주고 본인은 지휘를 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브라스밴드에 큰 애착을 갖고 있었는데, 한 아이가 이태석 신부에게 빨리 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하고 싶다고 하자, '먼저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단다.'라고 말한 일화도 있다. 그가 아이들에게 가르쳐 준 노래 중에는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가 있다. 2006년 첫 공연을 가진 브라스밴드는 남수단 정부행사에도 초청되는 등 수단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마을에서 이태석 신부만 가진 '사치품'이 있었다. 다름 아닌 전등과 냉장고였다. 백신을 비롯한 약물을 보관하기 위해 냉장고만큼은 꼭 필요했기에 집광판을 사 와 지붕에 직접 설치해서 발전을 하고 냉장고를 돌렸는데, 남는 전기는 해만 지면 암흑이라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하거나 겨우 촛불이나 켜던 아이들의 야간 학습을 위한 조명에 있는 대로 털어 주었다.
투병 중에도 자선 공연도 하고 각 지역의 성당을 직접 찾아가서 봉사활동과 지원을 호소하였지만, 결국 암이 간으로 전이되어 2010년 1월 14일 새벽 5시 35분, 위의 유언을 남기고 향년 47세로 사망했다. 나중에 남수단을 취재한 <울지마 톤즈: 그 후 이야기>라는 책자에서 말라리아로 다 죽어가는 현지인 환자를 본 한국인 의사가 "이태석 신부님 마지막 모습이 바로 저랬습니다..."이라며 병명은 다르지만 삐쩍 마른 모습으로 마지막을 맞이했다고 회고하는 게 나온다. 임종을 지켜본 수녀에 따르면 사망 몇 시간 전부터 의식이 희미해져서 손 하나도 제대로 못 움직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돈 보스코!"라고 외쳤는데 돈 보스코는 자신이 속해 있는 살레시오 수도회의 창립자이자 수호성인이다. 사망 직전 곁을 지키고 있던 수도회 수사들에게 '어젯 밤 꿈에서 돈 보스코가 나를 축복했습니다'라는 말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본인이 소속된 수도회의 설립자에게 인정받은 셈이다. 수녀는 이태석 신부에게 "돈 보스코 성인이 앞에 보이시냐"고 물었고, 이태석 신부는 고개를 약하게 끄덕였다. 그 다음 손을 들어 모여 있던 살레시오 수도회 수도자들에게 강복을 해준 다음, 위의 유언인 "Everything is good"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자료참조: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