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렬(吳宗烈, 1938년 11월 28일~2019년 12월 7일)
사회운동가
전라남도 고흥에서 중등 교사로 발령된 이후 초, 중,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했고 금산초등학교, 광주 동명여자중학교, 전남대학교 사대부속고등학교, 전남고등학교, 전남여고 교사로 교편을 잡았으며 1987년부터 전국교사협의회 활동과 교사 노조를 조직하는 노력을 하여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출범시켰다. 이후 전교조 광주광역시지부 초대 지부장 등을 역임했다. 1994년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돼 2년8개월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효순, 미선 사건 당시 미군 규탄, 노무현 탄핵 무효 운동, FTA 반대 운동,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대표 등에 참여하였다. 그밖에 언론, 시민단체에서 활동하였고,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의장, 한미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도 추대되었다. 1991년 지방자치제 부활 이후 민선 제1대 광주광역시의회 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1938년 11월 28일 전라남도 광산군에서 사회운동가 오정근(吳正根)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오정근은 인텔리로 어려운 가세에서도 일본에 유학, 도쿄 전기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그 뒤 여운형의 건국동맹에서 활동하다 1945년 해방이 되자 해방정국에서 여운형, 박헌영 등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와 나주인민위원회 농민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45년 10월 맥아더와 존 하지의 점령정책에 따라 미군정에 의해 나주에서 광주형무소로 끌려갔다. 그 뒤 광산군 인민위원장인 그의 외삼촌 역시 공산당 활동으로 미군정에 의해 수감되었다.
이후 어려운 환경에서도 면학하여 1965년 광주사범고등학교를 거쳐 전남대학교(교육학 학사)를 졸업했다.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 의장 등으로 활동하였고, 강연, 칼럼 기고 활동 등을 했다. 2002년 경기도 의정부에서 주한미군 탱크로 여중생 2명이 사망하자 그해 11월 효순 미선 살인사건때 여중생 범대위를 지도하였으며 노무현 탄핵때는 보수정치인에 대항하여 탄핵무효부패정치청산 범국민행동을 이끌었다.
2004년 민중연대 상임대표[4], 2005년 반(反)부시국민행동 상임대표를 거쳐 참여 정부에서 농민운동을 탄압하자 전용철농민살해범국민대책위(전용철범대위), 평택미군기지 확장저지 범국민대책위원회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2006년말 노무현 정권에서 한미 FTA를 강행하려 하자, 한미 FTA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다. 그 뒤 2008년 5월 광우병 수입소 반대 촛불집회에 참여하였다.
시민운동, 통일운동 등을 하며 보수단체로부터 비난과 표적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협박과 인신공격에 시달리기도 했다. [출처 필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의장, 한미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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